Herr.Kwak_일상/독일에서 이모저모

[독소불가침 조약] 2차대전의 직접적인 트리거

o헤어곽o 2020. 12. 24.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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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jsgml012&logNo=220888912289&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독일어: Deutsch-sowjetischer Nichtangriffspakt, 러시아어: Договор о ненападении между Германией и Советским Союзом)은 1939년 8월 23일에 나치 독일과 소련이 상호 불가침을 목적으로 조인한 조약입니다. 조약에 서명한 인물의 이름을 따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독일과 소련 간의 평화협정인 이 조약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2차 대전 이전까지 했던 각종 외교 협정과 정 반대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을 일으킨 직접적인 트리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년 뒤인 1941년에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여 독소 전쟁이 벌어져 이 조약은 파기되었기 때문인데요, 당시 여러 국가 간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독소 불가침 조약. 그 이면에는 어떠한 이야기들이 숨어있는지 차근차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출처 : https://www.sedaily.com/NewsVIew/1RY93SOMAE]

이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세계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를 증오한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독일에서 집권하자마자 독일 국회 의사당 방화 사건을 독일 공산당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독일 공산당을 불법화하여 강제로 해산시키고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불태우는 등 자국 내 좌익과 공산주의 세력들을 탄압했고 소비에트 연방도 나치 독일을 소비에트 연방을 크게 위협하는 나치즘 세력으로 생각하여 서로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만 해도 독일과 소련은 매우 사이좋은 우방국이었습니다.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서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군비를 제한 받음과 동시에 국제 연맹 가입을 거부당하고 있었고,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유로 역시 국제 사회에서 왕따 당하는 처지였기 때문인데요, 비록 양국이 1차 대전 때 피터지도록 싸웠다고는 하나, 소련에게 있어 그것은 러시아 제국의 일이었고, 독일 역시 독일 제국의 문제였습니다. 때문에 독소 양국은 1922년 라팔로 조약이라는 우호 조약을 체결하여 독일은 소련에게 여러 선진 군사 기술을 제공하고, 소련은 군비 제한이 많은 독일에게 비밀리에 신기술 연구 및 군사 훈련을 할 수 있는 시설을 자국 영토 내에 제공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양국 모두 폴란드라는 가상 적국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독일은 국경 인정 문제로, 소련은 1920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이후로 폴란드와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런 양국 관계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수상에 취임하면서 깨져 버립니다. 그는 시종일관 "때려잡자 공산당!"을 외쳤기에, 자연스레 소련과의 관계는 나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히틀러는 전체주의를 통해 민주정체도 부정했기 때문에, 자신의 체제가 우월하다고 전 세계적으로 선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스탈린도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체제 경쟁을 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독일-소련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게 되죠.

 


 

독소 불가침 조약을 설명하기에 앞서 그 당시에 독일과 소련의 상황은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진출처 : https://namu.wiki/w/%EB%8F%85%EC%86%8C%20%EB%B6%88%EA%B0%80%EC%B9%A8%EC%A1%B0%EC%95%BD]

1938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수데텐란트 할양(양국 간의 합의를 통해 자국 영토 일부를 다른 국가에게 넘겨주는 것, 다시 말해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에게 과거 수데텐란트 지역을 반환, 혹은 넘겨줄 것을 요구한 것이죠.)을 요구하며 유럽에 전쟁이 터질 위기가 도래하자 소련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당시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 군사 동맹을 체결한 상태였기 때문에, 유사시 동맹국의 안전 보장을 위해 참전하여 독일과 싸워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하지 않아, 폴란드 혹은 루마니아의 영토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이 가운데 폴란드는 죽으면 죽었지 소련군에게 영토 통과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했기 때문에, 루마니아로부터 영토 통과 허용을 약속을 받아야 했습니다. 독일과 체코슬라비아간의 충돌로 소련은 큰 위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집권 당시부터 소련을 비난했고, 소련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독일이 곧 소련과의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위기감이 소련 지도부를 덮쳤던 것이죠. 소련 외교부 장관인 막심 리트비노프는 당시부터 영국-프랑스와 동맹하여 독일을 포위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과 프란스가 독일에게 양보한 뮌헨 협정으로 이는 물거품이 되었으나, 독일이 뮌헨 협정 이후 폴란드에 계속 압력을 가하자 소련은 다시 영불과의 집단안보체제를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이 소련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폴란드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군이 바로 소련으로 쇄도할 것이라는 것이 바로 소련 지도부의 판단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리트비노프는 폴란드의 안보가 곧 소련의 안보라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사진출처 : https://namu.wiki/w/%EB%8F%85%EC%86%8C%20%EB%B6%88%EA%B0%80%EC%B9%A8%EC%A1%B0%EC%95%BD]

하지만 소련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 간의 집단안보체제는 시작부터 삐걱거리게 됩니다. 소련의 문서를 전달받은 지 6주가 지나서야 영국에서 답신이 왔으며, 그나마도 동맹 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비 회담을 열자는 데 동의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초조해진 몰로토프는 7월 17일, 영-불-소 외교 회담에서 군사 협약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요, 그러나 8월 10일이 되어서야 영국, 프랑스 협상단은 비행기가 아니라 여객선 '시티 오브 엑스터(City of Exeter)'호를 타고 레닌그라드에 입항한 데다가, 곧바로 모스크바에 가지 않고 하루를 관광으로 소비함으로써, 소련 측에 "저것들 놀러 왔나?" 같은 나쁜 인상을 심어주게 된 것입니다. 또한 협상단의 구성에서도 소련은 분개하게 됩니다. 소련 측 협상단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친구,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였습니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할 필요 없이 바로 군사 협정에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증명하는 문서를 영불 협상단에게 건넨 상황. 반면 영불 협상단장의 자격은 소련에 비해 상당히 떨어졌던 것입니다. 프랑스 협상단장은 프랑스 제1군관구 사령관 육군 대장(Army General) 조제프 두망(Joseph Doumenc)이었는데 보로실로프와 마찬가지로 협상 서명권을 지니고 있었기는 하나, 당시 프랑스군 내 서열 40위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할 정도로 자국 내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협상단장 레지널드 드락스 경(Reginald Drax)이 맡았는데, 그는 당시 해군 소장이었는데, 일개 함장 출신인 데다 영국 정부에 보고만 할 수 있을 뿐 협상 권한마저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더군다나 근본적으로 영-불 측은 처음부터 소련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1920-30년대 서방권 외교 기류였던 윌슨의 이상주의는 역사의 선악을 구분하는 흑백논리적인 경향이 있었고 당시 영불 협상단 측도 공산주의자 스탈린을 역사의 '악역'으로 보았기에 당연히 서로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협상 진행이 될 리 만무하였던 것이죠.

 


[사진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l4qdD6egRQE]

리트비노프가 구상한 집단안보는 위와 같이 영불도 소극적이었지만, 폴란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폴란드는 독일 못지않게 러시아/소련과 역사적인 여러 악연이 있었으며, 영토 할양을 요구하는 독일에 강경한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안보에 참여하라는 소련의 요청도 거절하였습니다. 영불이 소련의 제안에 소극적으로 나선 것도 바로 독일과 직접 국경을 맞댄 폴란드가 "소련과 군사협정을 맺지 않았으며 맺을 생각도 없다."라고 영불에게 단호하게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사진출처 : https://warfarehistorynetwork.com/2017/01/13/joseph-stalins-kliment-yefremovich-voroshilov-a-soviet-survivor/]

스탈린은 협상 내내 상당히 유연한 자세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협상 태도를 보고 나서 이들이 소련과 군사 동맹을 맺을 생각이 없다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들이 독일과 소련을 싸우게 하고 뒤로 빠지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된 것이죠. 스탈린은 이미 영국-프랑스와의 협상을 하기 전, 1939년 5월 [영/불/소]와 집단 안보 체제를 주장하던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장관을 해임하고, 심복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외무장관에 앉힌데 더불어, 리트비노프의 해임은 독일에 우호적인 제스처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어느 정도 자기 생각이 있는 리트비노프 대신 예스맨인 몰로토프를 앉혀 자기 뜻대로 영불과의 협상을 처리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5월 이후에도 소련은 독일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입니다. 하지만 연합국과의 회담은 진전이 없었고, 결국 1939년 8월 20일부로 회담은 허무하게 종료되고 맙니다. 소련은 영불 '부르주아'와의 협상을 일종의 '추진력을 위한 무릎 꿇기'정도로 생각했으며, 어차피 소련의 입장에서는 영불 서방국가들이나 나치의 파시스트나 똑같은 부르주아 반동분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과 스탈린 특유의 외교관계를 실용적이고 무감정하게 보는 태도가 합쳐지면서 스탈린은 '또 다른 부르주아들' 에게 협상 테이블을 마련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사진출처 : https://ichi.pro/ko/je-2-cha-segye-daejeon-choban-hiteulleowa-seutallin-ui-dongmaeng-223820932635278]

이때 스탈린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다름 아닌 독일, 히틀러 였습니다. 독일 또한 지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선을 마구 넓혀서 패배한 이후 양면 전쟁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깨달았으며 아울러 소련과 서방 세계가 접촉하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실제 참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침략 전쟁에 소련이 개입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만약에 대비하며 동부에서의 세력 균형을 위해 소련을 묶어둘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죠. 계획의 스타트를 끊게 될 폴란드 침공에 소련이 폴란드 편으로 개입하면 초장부터 만사를 그르칠 수 있으므로 히틀러는 소련을 어떻게 묶어둘 것인지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영불이 폴란드를 구하러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고, 폴란드군은 별 문제없겠지만 그 뒤에 있는 소련의 개입은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8월 2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리벤트로프는 이런 걱정을 하는 히틀러에게 스탈린과 협상하도록 권했고, 히틀러는 리벤트로프의 제안을 받아들여 소련에게 '발트해에서 흑해까지의 지역의 결산'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소련으로서는 구미가 매우 당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서방 놈들과 함께 자기들 도움은 죽어도 싫다는 폴란드를 돕느니, 세력권을 나눠서 서로 맛있게 잘 먹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독일의 제안이 훨씬 매력적이었습니다. 또한 냉정한 현실주의자인 스탈린은 만약 히틀러가 미치지 않고서야 서방 특히 대영제국을 뒤에 두고 소련을 적대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8월 17일 소련은 독일과의 회담에 동의했고, 8월 19일 양국은 독소 신용 협정(German-Soviet Credit Agreement)을 체결하였습니다. 

 


[사진출처 : https://adrian0220.tistory.com/143]

이어 스탈린은 답신을 보낸 8월 21일 외무 라인에 영불과의 협상 모색을 중단시키고 독일과의 협상 준비를 하도록 합니다. 8월 23일 히틀러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리벤트로프를 위시한 독일 외교단이 소련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고. 크렘린에서는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한 스탈린이 직접 외교단을 맞이하며 영국과 프랑스와의 집단안보체제 협의와는 다르게 우호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원래는 양국의 외무장관인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협상을 해야 했으나, 실제로는 스탈린이 여기에 동석해서 사실상 스탈린이 리벤트로프와 교섭하게 되었습니다. 협상은 리벤트로프가 도착한 8월 23일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계속되었으나, 의외로 양 독재국가는 아귀가 잘 맞아서 여러 현안에 대해 쉽게 합의하게 됩니다. 영불과의 협상이 질질 끌어서 1년이 지나도록 진척이 없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소련-나치 독일은 단 하루 만에 유럽의 운명을 결정할 모든 현안에 대해 합의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24일 모든 항목에 대한 합의문을 작성할 수 있었죠. 그리하여 아래 그림과 같이 스탈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사진출처 : https://namu.wiki/w/%EB%8F%85%EC%86%8C%20%EB%B6%88%EA%B0%80%EC%B9%A8%EC%A1%B0%EC%95%BD]


 

[독일과 소련은 10년 기한의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양국은 경제협력을 통한 상호 이익의 증진을 도모한다.]라는 조약 내용을 공개하였지만, 이러한 경제협력은 껍데기일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국경선 협약이 중심이었는데요.

 

[사진출처 : https://namu.wiki/w/%EB%8F%85%EC%86%8C%20%EB%B6%88%EA%B0%80%EC%B9%A8%EC%A1%B0%EC%95%BD]

 

이들 두 국가 간에는 이러한 조약이 있었습니다.

 - 독일과 소련 양국은 폴란드를 절반으로 분할한다.
 - 소련은 루마니아령 베사라비아(지금의 몰도바)를 차지한다.
 - 양국은 발트 3국을 분할하여,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소련이, 리투아니아는 독일이 각각 차지한다.
 - 핀란드는 소련이 차지한다.
 - 소련과 독일은 서로 필요한 여러 물자를 다수 지원한다.

 


[사진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D%8F%B4%EB%9E%80%EB%93%9C_%EC%B9%A8%EA%B3%B5]

이 조약은 철저하게 지켜지게 됩니다.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과 소련은 공동작전으로 폴란드를 분할했으며, 이후 독일의 묵인 아래 소련의 압력을 받은 루마니아는 베사라비아에 북부 부코비나를 얹어서 소련에 할양하였습니다. 발트 3국은 소련의 협박에 모조리 소련에게 넘어갔는데,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군이 소련령으로 합의되어 있던 바르샤바 주 동부와 루블린 주까지 차지하였고, 그 대신 원래 독일이 차지하기로 되어 있던 리투아니아를 소련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 조약에서 합의된 분할 대상 중 핀란드는 통째로 소련에 넘어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겨울전쟁에서 침공해 온 소련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선전하였고, 결국에는 국력의 격차를 넘지 못하고 패배해서 영토의 11% 정도(산업능력의 30%)를 소련에게 넘겨주게 됐지만, 이웃하는 발트 3국과는 달리 소련에 흡수되는 운명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물자 지원도 이전에는 소련에서 일방적으로 퍼준 것으로 취급했지만, 소련에서 독일로 간 것만큼 독일에서 난방용 석탄(연간 300만 톤), 최신 기계류(엔지니어 파견 포함), 발전설비, 방산 기술(비스마르크급 전함 설계도 등)이 넘어가면서 일방적인 흑자는 아닌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llym8252&logNo=221635090325&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이 조약의 체결로 소련의 개입을 막는 것이 가능해져 동부에 또 하나의 전선이 탄생할 가능성을 막은 이후 불과 8일 뒤에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 터지게 됩니다. 그 첫 번째로 폴란드를 침공하여 소련과 나눠먹은 이후 폴란드 침공 종료 8개월 후에는 프랑스를 항복시켰고 최전성기를 달리게 되죠. 소련도 동유럽에서 확보한 지역을 발판으로 세력을 크게 키웠으며, 독일과 함께 세계 구도 차원에서의 세력 분할을 염두에 두기 시작하게 됩니다.

[사진출처 : www.kiss7.kr]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야욕은 마침내 동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소련에게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소련을 기습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1939년 맺어진 독일과 소련 간의 독소 불가침 조약은 1941년 파기되고 맙니다. 그리고 독소전쟁은 시작됩니다.

 


 

2차 대전의 트리거가 된 독소 불가침 조약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체적인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내용은 아래 포스팅에서 확인해보세요.

 

[포스팅 - 제 2차 세계대전. 다방면에 걸친 그 이야기 속으로]

herr-kwak.tistory.com/286

 

제 2차 세계 대전. 다방면에 걸친 그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자.

독일 하면 아직까지 빼놓을 수 없이 연계되는 이미지는 세계 대전의 패망국이자 주축국이라는 것인데요. 아돌프 히틀러라는 희대의 독재자를 배출한 그 제2차 세계 대전. 수많은 사전 원인들과,

herr-kwak.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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