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r.Kwak_일상/독일에서 이모저모

제 2차 세계 대전. 다방면에 걸친 그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자.

o헤어곽o 2020. 12. 21.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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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www.tagesspiegel.de/themen/zweiter-weltkrieg/]

 

독일 하면 아직까지 빼놓을 수 없이 연계되는 이미지는 세계 대전의 패망국이자 주축국이라는 것인데요. 아돌프 히틀러라는 희대의 독재자를 배출한 그 제2차 세계 대전. 수많은 사전 원인들과, 여러 가지 전투들이 종합된 이 세계 대전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출처 : https://www.huffingtonpost.kr/taekyung-lee/story_b_7218550.html]

 

1918년 11월 11일 1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전쟁에서 패배한 독일은 수많은 식민지를 모두 잃고 엄청난 배상금을 끌어안게 됩니다. 그리고 배상금을 갚기 위해 무분별하게 돈을 찍어 내기 시작하였고, 국민들은 이러한 것이 자신들에게 너무 불공정하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한 인물이 홀연히 등장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그는 독일인의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시켜주는 웅변으로 점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으며, 패배감에 찌들어 있던 독일인들에게 자부심을 고취시켜 주며 결국 수상에 임명됩니다.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007nis/15863060]

 


[사진출처 : http://m.blog.daum.net/gmania65/1304?np_nil_a=1]

 

독재체제를 이룬 히틀러는 배상금 지급은 물론 1차 대전에 대한 피해를 책임지는 약속인 베르사유 조약[하단 포스팅에 자세히 설명]을 위반하고 독일이 중심이 되어 유럽을 재편해야 한다며 군대를 다시 재무장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독일은 우측에 위치한 폴란드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점령한 독일의 영토 일부분을 되찾기를 원했고, 이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후 구영토의 반환을 폴란드에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였습니다. 영유권을 두고 폴란드와 외교적 분쟁을 빚은 끝에 결국 독일에게, 아니 히틀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군사적인 해결책 외에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포스팅 - 1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베르사유 조약, 꺼지지 않은 전쟁의 불씨]

herr-kwak.tistory.com/290

 

베르사유 조약. 1차 세계대전의 끝. 그리고 끝나지 않는 2차 세계대전의 불씨.

1914년 시작되었던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게 되었고, 독일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그 책임에 대한 논의가 있고, 그 조약이 만들어진 것이 바로 베르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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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blog.daum.net/gmania65/1518]

 

하지만 군사적인 해결책도 그리 만만하지 않았는데요,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와 상호 방위조약으로 결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당연히 영국과 프랑스의 참전을 불러오게 되고 독일은 1차 세계대전때처럼 동서 양측에서 조여 오는 협공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양면전선을 절대적으로 피해야만 했던 독일은, 새로운 방안을 찾기 시작했고, 폴란드의 우측에 위치한 소련과 비밀협상을 벌여 독일과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서로 침략하지 않겠다는 독/소 불가침조약[하단 포스팅에 자세히 설명]을 체결하게 됩니다. 또한 폴란드를 점령하게 되면 폴란드를 동서로 나누어 폴란드 영토의 서쪽 반은 독일이 가지고, 동쪽 반은 소련이 가진다는 데 합의하게 됩니다.

 

[포스팅 - 2차 세계대전의 트리거가 된 독소불가침조약]

herr-kwak.tistory.com/293

 

[독소불가침 조약] 2차대전의 직접적인 트리거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독일어: Deutsch-sowjetischer Nichtangriffspakt, 러시아어: Договор о ненападении между Германией и Советским Союзом)은 1939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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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oB3Vev8kcBY]

 

그렇게 1939년 09월 01일 새벽. 독일은 선전포고도 없이 급작스레 폴란드를 침공하였으며, 소련은 독일과의 합의에 따라 함께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그리고 당시 폴란드와 동맹관계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시작하게 됩니다.

 


[사진출처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6480703&memberNo=2170791]

 

독일군은 소련군의 도움과 함께 신속한 기동력과 기습을 앞세워 폴란드를 전쟁 초기에 끝내기 위한 전격전을 펼치게 되는데요, 이 전략은 독일이 구 프로이센 시절부터 계속해서 펼쳐왔던 독일만의 전략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독일은 소련과 함께 3주만에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함락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폴란드는 수적으로도 열세였으며, 특히 최신예 탱크로 무장한 독일군의 군대는 폴란드에게 너무나도 강력한 존재였습니다. 또한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공격할 부대를 제대로 모으기도 전에 폴란드가 항복을 선언해버렸기 때문에 제대로 독일에 피해를 주지 못하게 됩니다. 사실 이 때에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가 점령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인 작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사진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oB3Vev8kcBY]

 

폴란드 점령에 성공한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에게 가장 위험한 적은 영국이지만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프랑스를 먼저 꺾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폴란드 점령에 성공한 후 곧바로 영국과 프랑스에 맞서는 작전을 수립한 독일은 먼저 프랑스에 대한 침공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10년전부터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방어가 최선의 전략이라고 인식하게 되었고, 앙드레 마지노 장군의 주장에 따라 약 160억 프랑의 비용을 들여 국경을 방어하는 엄청난 요새를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지역에 설치하게 됩니다. 이 요새는 독립적으로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수백 개의 방어시설과 벙커가 설치되어 있는데 길이가 750km에 달합니다. 이 어마어마한 건설비로 인하여 많은 부담을 안겨주는 계획이었지만, 1차 세계대전에서 크나큰 인명피해를 입었던 프랑스에서는 큰 반대 여론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이 최종 요새는 앙드레 마지노 장군의 이름을 따서 마지노선[하단 포스팅에 자세히 설명]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마지노선이라는 표현이 시작된 유래입니다.

 

[포스팅 -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방어선. 동시에 최전선의 단단한 난공불락의 요새 마지노선]

herr-kwak.tistory.com/294

 

[마지노선]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방어선. 실제로는 최전선의 단단한 요새.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 중에 „마지노선“이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방어선, 최후의 보루라는 뜻인데요, 하지만 실제 마지노선(마지노 요새)은 최후의 방어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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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militaryhistorynow.com/2017/05/07/the-great-wall-of-france-11-remarkable-facts-about-the-maginot-line/]


[사진출처 : https://m.blog.naver.com/businessinsight/221409449749]

 

프랑스 침공을 준비하던 독일은 도저히 이 강력한 요새 마지노선을 정면으로 뚫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대안을 찾게 됩니다. 전면전 대신에 요새를 우회해서 빈공간으로 돌파하겠다는 전략을 세웁니다. 그 빈 공간에는 프랑스의 아르덴 숲이 존재하는데, 그 부근은 우거진 나무가 많아 독일의 탱크와 같은 기갑부대가 침공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는 이곳을 독일군의 침투경로로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어태세를 느슨하게 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독일은 마지노선을 우회해서 침공을 하기 위해 당시 중립국으로 있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프랑스의 아르덴 숲을 통해서 침공을 시작합니다. 또한 예로부터 독일과 상호 협력조약을 맺고 있었던 이탈리아는 독일을 도와 프랑스의 남부를 침공하는 작전을 펼칩니다. 마지노 요새를 우회한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때와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밀고 나갔으며, 서부전선이 완전히 붕괴되어 영국과 프랑스는 전면패배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고, 후퇴를 거듭하던 끝에 1940년 덩케르크 해안에서 대규모 탈출작전을 시도합니다. 이것이 덩케르크 철수 작전[하단 포스팅에 자세히 설명]인데요. 영국과 프랑스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최대 규모의 해상 탈출 작전을 시도했고, 독일군에게 장비와 물자를 넘기지 않고 철수에 성공합니다. 이렇게 독일군은 프랑스 점령까지 마치게 됩니다.

 

[사진출처 :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4&num=198110]

 

[포스팅 - 33명의 병력을 구한 인류 최대규모의 구출 작전 덩케르크 구출 작전]

herr-kwak.tistory.com/305

 

[덩케르크 구출 작전] 33만명의 연합군을 구한 인류 최대의 구출 작전.

다이나모 작전이라고도 불리는 덩케르크 철수작전은 30만 명이 넘는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 병사들이 독일군으로부터 탈출한 작전입니다. 물론 이 작전이 순탄하게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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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패망시킨 독일은 프랑스의 북부지역, 프랑스의 절반은 직접 지배하였으며, 남부지역은 프랑스의 친독일 정권을 세워 간접 지배하는 전략을 취합니다. 이후 독일은 곧바로 지체하지 않고 영국으로 진격의 방향을 틀었고, 영국은 독일과 길고 힘겨운 전쟁을 계속해야만 했습니다. 영국의 해군은 전통적으로 아무도 넘보지 못할 만큼 강력함을 자랑했는데요, 때문에 바다에서의 전쟁은 피해야만 했던 독일은 먼저 자신들이 우세한 공중전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노력을 기울입니다. 전투기의 수는 독일군이 영국군보다 3배가량 많았는데요, 이를 기반으로 우선 항구 및 선박 시설들을 격파하기 시작했고, 비행장과 산업 시설들을 차례로 격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열세속에서 영국은 전역에 대규모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여 적의 정보를 분석하고 독일군을 요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독일은 70만 병력을 영국에 상륙시키고자 하는 작전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게 되고, 영국은 독일의 침공을 방어하는 데 성공합니다.

 

[사진출처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6490445&memberNo=2170791]

 


[사진출처 : https://kiss7.tistory.com/552]

 

폴란드 침공 이후 승승가도를 달리다 처음으로 패배를 맛본 히틀러는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전쟁물자 확보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때 히틀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동맹국인 소련의 풍부한 석유와 자원이었는데요, 소련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히틀러는 영국이 자국의 피해를 복구하는 데에 주력하는 동안 그리스를 점령한 후,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으로 진격을 시작합니다.

 


[사진출처 : http://mlbpark.donga.com/]

 

1941년 6월 6일, 독일이 동맹국을 비롯한 군사 300만명을 동원하여 ‚바르바로사 작전‘[하단 포스팅에 자세히 설명]을 개시하여 소련 침공을 시작합니다. 이 작전의 중점은 소련의 중심부로 가는 1500km에 달하는 전선에 최대 규모의 군사력을 집결시켜 세 가지 루트로 나누어 침투하겠다는 작전이었습니다. 독일군으로부터 불시에 침공을 받은 소련은 즉시 영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후퇴를 거듭하던 끝에 수도 모스크바까지 불과 30km를 남겨둔 상황에까지 몰리게 됩니다. 이때 소련에서는 1937년부터 38년에 이르기까지 내부적으로 독재자 스탈린이 정권을 쥐기 위해서 자신의 반대세력이나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모두 숙청하게 되는데요(스탈린 대숙청), 이 대숙청으로 인해 수백에서 수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당시 최고 군부 사령관들 역시 대다수 숙청되었기 때문에 초기 독일과의 전쟁에서 제대로 된 군사작전을 펼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소련군의 탱크는 독일군의 탱크에 비해 화력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에 독일군이 파죽지세로 수련을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해 겨울이 시작되면서 독일군은 혹한의 겨울을 맞이하게 됩니다.

 

[독소전쟁 1막 - 독일의 소련 침공 시작, 바르바로사 작전]

herr-kwak.tistory.com/320?category=883691

 

[독소전쟁 1막] 독일의 소련 침공 - 바르바로사 작전

폴란드 침공 이후 승승 가도를 달리다 영국군에 의해 처음으로 패배를 맛본 히틀러는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전쟁물자 확보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때 히틀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동맹국인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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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dongbeiren.tistory.com/1166]

 

이때 아시아에서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것이 만주사변으로 일어난 ‚중일전쟁‘입니다. 당시 일본은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식민지를 더욱 확보하려는 침략의 길을 선택하게 되는데, 자원이 풍부한 중국의 만주는 첫번째 목표가 됩니다. 이렇게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쉽게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던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쟁에 필요한 석유와 목재가 더욱 많이 필요하게 된 일본은 동남아 지역의 인도차이나 반도를 노리게 됩니다. 이 당시 인도차이나반도는 미국과 유럽 강호들의 식민지였는데, 유럽 전선에서 수많은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자연스럽게 식민지 관리가 소홀해졌고 이 틈을 타 일본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노리게 됩니다. 이러한 일본의 모습을 지켜보던 미국을 포함한 유럽의 국가들은 일명 ABCD 포위망(America, Britian, China, Dutch)을 형성해 일본에 석유와 물적 자원 수출을 금지시킴으로써 고립시켜 버립니다. 이렇게 장기전에 필요한 전력물자가 차단된 일본은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사진출처 : https://enflenfl.tistory.com/772]

 


[사진출처 : https://jeong3841.tistory.com/26]

 

이에 분노한 일본은 도조 히데키를 앞세워 미국의 하와이와 인도차이나반도에 있는 동남아를 침공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도조 히데키는 일본의 침략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전범입니다.)

 

[사진출처 : http://www.opini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385]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선전포고 없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타깃으로 미국 전진 기지들을 습격하며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시작됩니다. 진주만 폭격 후 동남아 지역을 파죽지세로 확보하였고, 당시 일본과 동맹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도 일본의 태평양전쟁 지원에 나섭니다. 이에 대응해 1942년 1월 미국과 영국, 소련 등 26개 국가가 워싱턴에서 [연합국 선언]에 합의하며 연합국을 결성하여 이에 맞서게 됩니다. 전쟁 초기에는 오랫동안 미리 전쟁 준비를 해온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의 추축국이 유럽전선과 태평양전선 모두에서 승리를 이어갑니다. 하지만 1942년 6월 전쟁의 판도를 뒤집은 사건을 미국이 만들어냅니다.

 

[사진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oB3Vev8kcBY]

 


[사진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oB3Vev8kcBY]

 

아시아전선에서 일본과 한창 태평양전쟁 중인 미군에는 블랙챔버라고 불리는 암호해독팀이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군의 전쟁 암호 파악을 위해 힘쓰고 있었습니다. 이때 일본군의 무전에서 반복되는 단어 사용에 주목한 결과, AF라는 단어가 바로 미드웨이 섬을 뜻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 확신으로 일본보다 한발 더 앞서서 미드웨이에서의 전투를 준비할 수 있었는데, 이 전투에서 해전을 격파하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합니다.

 

[사진출처 : https://band.us/band/64189849/post/5876]

 


[사진출처 : https://kiss7.tistory.com/553]

 

전쟁이 장기화되기 시작하면서 유럽전선의 독일은 보급로 확보에 애를 먹게 되고, 제대로 된 보급이 불가능해져 갑니다. 이에 더불어 영하 40도의 혹독한 추위는 독일군에게 더 큰 피해를 가져다줍니다. 동상으로 사망하는 군인들이 대거 발생하기 시작하였던 것이죠. 이후 1943년 1월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하단 포스팅에 자세히 설명]에서 독일군을 포위하여 궤멸에 필적하는 피해를 입힙니다. 이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독일군에 대한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독소전쟁 2막 - 피비린내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herr-kwak.tistory.com/391?category=883691

 

[피비린내나는 역사상 최대 사상자를 낸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자.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그라드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군과 추축군의 대격전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베르됭 전투가 있었다면 제2차 세계 대전에는 스탈린그라

herr-kwak.tistory.com

 

[사진출처 : https://worldoftanks.asia/ko/content/contents_center/gaudi/gaudi_stalingrad_battle/]

 


[사진출처 : https://koukon.tistory.com/3]

 

이 무렵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은 북아프리카를 통해 이탈리아를 공격하였고, 이에 파시스트 정부의 무솔리니가 무너지며 연합군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냅니다. 이렇게 승기를 잡은 연합군은 다음 해 6월 아이젠하워 장군의 지휘 아래 역사에 길이 남을 상륙작전을 펼치게 되는데요,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역에 3주동안 15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륙시키는 1944년에 펼쳐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입니다. 이를 통해 파리를 탈환하면서 프랑스 해방에 성공한 연합군은 전쟁의 승기를 잡고 동서에서 독일군을 압박합니다.

 

[사진출처 : http://study.zum.com/book/19155]

 


[사진출처 : https://m.cafe.daum.net/binidad/Pzu6/80]

 

잠깐의 재정비를 마친 아돌프 히틀러는 최후의 도박을 시도하게 됩니다. 바로 아르덴 대공세로 불리는 „벌지 전투“입니다. 전쟁 초기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던 아르덴 숲 경로를 다시 한번 돌파하는 것으로 남아있는 전차와 병력을 대거 집중시켜 이 아르덴 숲을 재돌파 하기로 계획한 것입니다. 항공기에 의한 폭격으로부터 부대를 보호하고 진격하기 위해 작전시기는 아르덴 숲이 안개에 휩싸이는 겨울로 잡습니다. 안개로 뒤덮인 1944년 12월 16일, 독일군은 파죽지세의 기세로 밀고 나갔지만, 1주일만에 날씨가 거짓말처럼 개이면서 전세가 역전됩니다. 또한 히틀러의 예상보다 연합군이 이 전투에 빠르게 대응했기 때문에, 이 벌지전투는 한 달 만에 독일군의 패배로 끝나게 됩니다.

 

[사진출처 : https://m.cafe.daum.net/binidad/Pzu6/80]

 


[사진출처 : https://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30611601010]

 

1945년 4월 22일. 소련군이 독일의 수도 베를린까지 입성하게 되고, 완전히 패배하게 된 히틀러는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 히틀러는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 후 바로 다음 날, 이 둘은 자살을 하고 죽은 모습으로 발견됩니다. 이로써, 유럽에서의 공식적인 2차대전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사진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port_112&logNo=221029297477&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이탈리아와 독일 등 대부분의 주축국들이 항복을 하고 이제 남은 건 일본뿐인 상황.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1945년 미국, 영국, 소련이 독일의 포츠담에서 일본과 식민지 처리 문제에 대해 논의를 하는 포츠담 회담을 가집니다. „다른 대안은 없다. 어떠한 지연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단호한 문장과 의지를 표출함으로써,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여 일본은 총체적인 파멸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 포츠담 선언에 대해서 „묵살한다.“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거절하였고, 당시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있던 소련 또한 대일전에 참전하는 것을 연합국에 약속했기 때문에 연합군에게 남은 것을 일본에 대한 무력행사뿐이었습니다. 결국 일본에는 미국이 태평양상의 미국 티니안 기지에서 발진시킨 초공위 요새 폭격기(D-29)를 통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핵폭탄이 떨어지게 됩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결국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제 2차 세계대전은 종식됩니다.

 

[사진출처 : https://news.joins.com/article/22627125]

 


[사진출처 : https://dongbeiren.tistory.com/1302]

 

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판도는 크게 바뀌게 됩니다. 유럽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그리고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 민주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신으로 하는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게 됩니다. 두 진영의 사상적인 이념 대립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세계를 반으로 분리시키게 됩니다. 그렇게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첨예한 대립으로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가 계속되는 냉전체제로 돌입하게 됩니다.

 


 

이렇게 제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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