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r.Kwak_일상/독일에서 이모저모

[베르사유 조약]. 1차 세계대전의 끝. 그리고 끝나지 않는 2차 세계대전의 불씨.

o헤어곽o 2020. 12. 23.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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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www.daserste.de/information/politik-weltgeschehen/erster-weltkrieg/index.html]

 

1914년 시작되었던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게 되었고, 독일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그 책임에 대한 논의가 있고, 그 조약이 만들어진 것이 바로 베르사유 조약이죠.

하지만 이는 1차 세계대전의 끝임과 동시에 2차 세계대전의 불씨로 이어집니다. 그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사진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ils5229&logNo=220468665661&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후, 독일군은 한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동쪽으로는 러시아와 동부전선이, 그리고 서쪽으로는 프랑스와 서부전선이 공존하는 것인데요, 한정된 자원을 나눠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동시에 전투를 치르게 되면 프랑스와 러시아에게 밀릴 것 당연지사였죠. 이러한 전략적 난관은 독일 내에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던 수준이었기에 독일은 전쟁 이전부터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 놓았습니다. 전쟁이 벌어질 경우 먼저 북서쪽, 다시 말해 중립국이었던 벨기에를 경유하여 프랑스를 단기간에 정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기간에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서부전선의 자원을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켜 러시아와 싸운다는 생각이었죠. 이는 그 당시 러시아는 프랑스보다 전쟁을 준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생각을 바탕에 둔 것이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www.lpb-bw.de/erster-weltkrieg-zusammenfassung]

그러나 시작된 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의 예상과 달리 프랑스는 단기간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전쟁 시작 한달이 지났을 무렵인 9월 5일부터 프랑스는 파리의 동쪽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영국군과 합세하여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을 하였고, 전쟁은 장기전의 양상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독일군은 이후에도 프랑스 함락을 위해 지속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참호전의 양상을 띤 전투에서 불과 몇십 미터를 전진하기 위해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전투가 지속됩니다. 해상에서마저 영국군의 해군에 꽁꽁 묶여버린 독일은 U보트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악수가 되고 맙니다. 미국의 참전을 불러온 것이죠.

[사진출처 : https://www.ndr.de/geschichte/chronologie/Der-uneingeschraenkte-U-Boot-Krieg-im-Ersten-Weltkrieg,ubootkrieg104.html]

 


[사진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algu10&logNo=220734793722&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말라가는 자원속에서 수 차례 총력을 다한 공격이 통하지 않게 되자 1918년 가을 이미 군부 내부적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까지 주요 전선은 독일 자국이 아닌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에 있었기 때문에, 독일 국민들은 독일군의 이러한 내부 사정은 알지 못한 채 패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wopen.net/contentmb.asp?idx=23364]

이런 상황속에서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14개조 원칙을 발표하며 독일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한 조건들을 제시하자 독일 군부는 그동안 가지고 있던 권력을 의회에게 넘겨주게 되고, 의회로 하여금 연합국들과 휴전 협상을 가지게 합니다. 이렇게 독일은 미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 강화조약은 바로 프랑스의 상징 중 하나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베르사유 조약입니다.

 


[사진출처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7273402&memberNo=34862819]

이 베르사유 궁전을 조약의 체결 장소로 지정한 데에는 프랑스 측의 다분한 의도가 숨어있었습니다. 당시보다 48년전인 1871년,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가 독일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독일의 통일이 선포가 되었는데요, 프랑스의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이런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것에 프랑스 국민들은 분개하였기 때문입니다. 1871년 이후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Toujoursy penser, jamais en parler“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을 정도로 민족적인 치욕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말의 뜻은 „항상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만, 절대 입 밖으로는 내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말은 못 했지만 결코 그날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죠. 그리고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1919년 프랑스인들은 같은 장소에서 독일에 대한 승리를 확인시켜줌으로써 이전의 수치를 독일에게 되돌려주려는 것이었죠. 당시의 총리 클레망소는 이 협정 장소를 강력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사진출처 : https://zznz.co.kr/archives/6850]

 


[사진출처 : http://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03/2018010300003.html]

그런데 시작된 협상은 독일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을 띄게 됩니다. 협상에서는 무려 27개국이 참가했을 정도로 강화회담은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의 대규모 협상이었습니다. 러시아가 1917년 독일과 평화협정을 자체적으로 거쳐 빠진 것을 제외한다면, 전쟁에 참가했던 대부분의 국가들이 강화회담에 어떻게든 참여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죠. 그러나 실질적인 협상 과정에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 프랑스의 클레망소 총리,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 그리고 이탈리아의 오를란도만 총리가 주도적인 위치를 가지고 참여하였습니다. 이 4명이 100여 차례의 회담을 통해서 결정한 사항들을 나머지 국가들이 승인하는 형태로 협상은 이루어졌습니다.

 

발언권을 얻지 못한 독일의 대표단은 협상 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습니다. 이는 독일군이 승전국들간의 입장차를 이용하여 협상 과정에서 승전국들 사이를 이간질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brunch.co.kr/@ldmin1988/11]

승전국들 사이에서 실제로 미묘하게 요구사항에는 차이가 있었는데요, 승전국들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선 프랑스는 1871년 프로이센에게 패배한 이후 빼앗겼던 알자스-로렌 지역을 되찾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의 대부분의 전투가 프랑스 영토에서 벌어졌기에, 프랑스는 전쟁을 통해 인적, 그리고 자원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으로 프랑스의 많은 마을들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4년간 130만명의 군인과 4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희생되었을 정도였죠. 당시 18세에서 30세 사이의 남성의 25% 정도가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프랑스는 전쟁에서 입은 피해보상과 더불어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도록,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영토적으로 약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산업적 주요 거점이었던 독일의 라인강 서쪽 지역을 프랑스의 영토로 병합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사진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LdE0ZKThP-o]

이에 반해 전쟁에서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영국과 미국은 독일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하였지만, 프랑스와는 다른 입장을 보입니다. 독일이 영구적으로 약해지기를 바라지는 않았던 것인데요, 이는 독일의 힘이 깨어지면 유럽 대륙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져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는 인명피해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순수한 전쟁비용만 보상하기를 원할 정도로 독일에게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자국 내에서 강한 반발에 부딪혀 입장을 철회하였죠. 대신 영국은 독일이 유럽 대륙 바깥에서 자신들을 위협할 수 없도록 독일이 더 이상 식민지 운영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렇게 독일과 바다를 맞대고 있는 영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 간에 요구사항은 달랐는데요, 승전국들은 이러한 요구사항을 조율한 후, 1919년 5월 7일. 최종적으로 정리된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을 독일에게 전달합니다. 아니, 일방적으로 통보합니다.

 


 

최종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담긴 주요 내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사진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LdE0ZKThP-o]

우선, 독일은 많은 영토를 잃게 됩니다. 서쪽으로는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랑스에게 내주게 되고, 북쪽지역은 덴마크에게, 동쪽 지역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많은 영토를 내주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전쟁 이전 영토의 13%를 잃게 되었고, 인구로 따지면 10%가량을 잃게 되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news.joins.com/article/23420130]

또한, 그동안 해외에서 가지고 있던 식민지를 잃게 됩니다. 또한 군사적으로도 제약이 걸리게 되죠. 10만명의 육군, 그리고 1만5천명의 해군으로 군사력에 제한을 두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징병제는 금지되었고, 라인강 서쪽을 비무장화 하여야 했으며, 탱크와 같은 무기를 보유할 수 없게 됩니다.

 


[사진출처 :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85]

경제적으로도 이후 배상금을 명확히 책정하기 이전에 1921년까지만 하여도 대략 100억 마르크를 즉시 배상하여야 했는데, 이는 대략 7천톤의 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초반에는 현물로 배상금을 지불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음 해에는 이후 42년간 1300억 마르크를 나눠서 지불하기를 요구를 받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승전국들은 이러한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조약 231조에 전쟁의 발발과 피해에 대한 책임을 오로지 독일과 독일의 동맹국에 있음을 인정한다는 사항을 넣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hem1&logNo=220794889764&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독일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치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대표적인 학자였던 막스 베버를 포함한 독일의 대표단에게 조약이 통보되었을 때 거부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였던 필립 샤이데만은 이 조약의 승인을 인정할 수 없어서 총리직에서 내려오기까지 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8891395&memberNo=15488287]

그러나 승전국들은 독일이 조약의 승인을 거부하면 군대를 독일 지역으로 진군시킬 수밖에 없다며 강경책을 선택합니다. 더군다나 영국의 해상 봉쇄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식량 공급을 비롯한 보급이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이죠. 때문에 6월 22일 새로 생긴 바이마르 공화국의 의회는 237대 138로 베르사유 조약을 승인하기에 이릅니다.

 


[사진출처 : http://deutsche-zeiten.de/republik-ohne-republikaner/]

이러한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1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조약을 받아들인 많은 독일 국민들은 이를 납득할 수 없었는데요, 이로 인해 공화정 의회에 대한 불신은 극도로 높아졌습니다. 이후 히틀러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Republik ohne Republikaner“라는, 다시 말해 „공화주의자 없는 공화국“이라는 조롱을 받게 됩니다. 또한 어쩔 수 없이 조약을 승인해야 했던 많은 정치인들은 조국의 배신자라는 낙인에 모자라, 당시 외교부 장관 발터 라테나우는 1922년 암살되기도 하였죠.

 


[사진출처 : https://artsandculture.google.com/entity/m01w_xd?hl=ko]

그리고 이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파 세력이 독일 자국 내에서 힘을 얻게 됩니다.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을 지켜보던 프랑스 측의 대표 페르디낭 포쉬가 프랑스의 입장에서 이러한 제약이 너무 강경하지 않다며 불만 섞인 말을 했다고 하는데요, „이것은 평화가 아니다. 단지 20년간의 휴전일 뿐이다.“라고 말이죠. 이는 실제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고 정확히 20년 후인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에 비춰보면 놀라운 예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1차 세계대전의 결말이자, 2차 세계대전의 시초를 안겨 준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전체적인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내용은 아래 포스팅에서 확인해보세요.

 

[포스팅 - 제 2차 세계대전. 다방면에 걸친 그 이야기 속으로]

herr-kwak.tistory.com/286

 

제 2차 세계 대전. 다방면에 걸친 그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자.

독일 하면 아직까지 빼놓을 수 없이 연계되는 이미지는 세계 대전의 패망국이자 주축국이라는 것인데요. 아돌프 히틀러라는 희대의 독재자를 배출한 그 제2차 세계 대전. 수많은 사전 원인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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