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r.Kwak_일상/독일에서 이모저모

[독소전쟁 1막] 독일의 소련 침공 - 바르바로사 작전

o헤어곽o 2021. 1. 1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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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www.annefrank.org/en/anne-frank/go-in-depth/germany-1933-democracy-dictatorship/]

 

폴란드 침공 이후 승승 가도를 달리다 영국군에 의해 처음으로 패배를 맛본 히틀러는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전쟁물자 확보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때 히틀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동맹국인 소련의 풍부한 석유와 자원이었는데요, 소련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히틀러는 영국이 자국의 피해를 복구하는 데에 주력하는 동안 그리스를 점령한 후,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으로 진격을 시작합니다. 1941년 6월 22일 그렇게 독소전쟁은 시작됩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배한 독일군은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패전을 하게 되는데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전쟁으로 기록된 독소전쟁 그 1막.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rtman10&logNo=220412905059&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최대 규모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전쟁에 대해서 살펴보기에 앞서서 당시 독일과 소련의 상황에 대해서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을 텐데요, 당시 소련은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서 스탈린이 집권에 성공을 하고 복잡한 국내 정세를 가지고 있었고, 독일은 히틀러가 집권 후 파시즘이 정착되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은 자본주의를, 그중에서도 특히 파시즘을 가장 큰 적으로 생각을 했고, 히틀러 역시 공산주의를 파시즘을 방해하는 가장 위험한 세력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상호간에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음은 물론 탄압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독일과 소련은 경제협력을 맺게 됩니다. 1차대전의 패전 이후 바르세유 조약으로 인해 많은 제약에 걸린 독일은 산업화를 추진하고 있는 소련에 공장을 짓고 무기 생산을 지원하면서 결과적으로 독일의 군사 기술과학의 발전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더불어 소련은 그 대가로 독일에게 가장 필요했던 석유와 군수물자 등을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던 소련과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직전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후 독일은 폴란드 침공에 성공하고 폴란드를 독일과 소련이 양분하게 됩니다. [독소불가침 조약에 재해서는 하단 포스팅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독소불가침 조약 - 제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트리거]

herr-kwak.tistory.com/293

 

[독소불가침 조약] 2차대전의 직접적인 트리거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독일어: Deutsch-sowjetischer Nichtangriffspakt, 러시아어: Договор о ненападении между Германией и Советским Союзом)은 1939년 8..

herr-kwak.tistory.com

 


[사진출처 : https://brunch.co.kr/@robintoto/2]

폴란드를 점령한 후, 서부전선에 주력한 독일은 프랑스마저 6주 만에 함락시키고 맙니다. 그리고 독일군은 영국으로 눈을 돌리게 되죠. 쉽게 함락을 시키거나 협상 테이블로 영국을 이끌어내려는 독일의 생각과는 달리 영국의 저항은 완강했고, 독일의 영국 침공 작전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의 장기화를 우려한 독일은 전쟁물자 확보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때 히틀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동맹국인 소련의 풍부한 석유와 자원이었는데요, 소련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히틀러는 영국이 자국의 피해를 복구하는 데에 주력하는 동안 그리스를 점령한 후,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으로 진격을 시작합니다. 또한 독일의 판단에서 영국군의 완강한 저항은 배후 세력이 있다고 판단을 하였던 것인데요, 그 배후로 미국과 소련을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까지 진출할 수 없었던 독일은 소련으로 눈을 돌렸던 것입니다. 만약 소련을 무찌른다면 영국도 어쩔 수 없이 저항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사진출처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6490445&memberNo=2170791]

 


[사진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B%9F%AC%EC%8B%9C%EC%95%84_%ED%98%81%EB%AA%85]

독일의 동유럽 진출은 자원과 물자 확보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판단을 하였는데, 이는 소련 역시 생각하고 있었던 부분이었습니다. 양국은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이는 상호간에 일시적인 것이었지, 영원한 양국간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히틀러는 영국 정복 전에 소련을 침공하자는 주장을 펼치게 되는데요, 이는 독일 수뇌부에서도 반대가 많았습니다. 영국과 소련을 향한 양면 전쟁을 위험하다는 것이었는데요, 히틀러는 두 가지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입니다. 우선, 소련은 앞으로 계속해서 성장하고 강해질 것이고,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자신들이 역으로 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확신은 자신감이었습니다. 현재 군사력으로 판단하건데, 독일군이 소련군보다 앞서고 있으니, 단기간에 승부가 가능할 것이라는 자신감이었던 것입니다. 히틀러의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스탈린의 집권 이후 자본주의 세력에 대한 어마어마한 숙청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불어 1937년에는 군부 숙청까지 이루어져 8만 명의 장교 중 3만 명의 장교가 숙청이 되었던 것이죠. 다시 말해, 당시 소련군은 제대로 된 전략을 펼칠만한 군부 또한 마땅치 않았던 것입니다.

 


[사진출처 : https://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4&pn=0&num=169557]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독일군은 „우리가 한번 걷어차면, 소련군은 썩은 문짝처럼 부서질 것이다.“라며 강한 자신감을 내비칩니다. 소련 정복에 6주, 최대 10주면 가능하다는 호언장담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부전선 영국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히틀러는 동부전선으로 독일 대군을 보낼 결심을 한 것이죠. 그렇게 1941년 6월 22일 새벽, 독일군은 소련으로 침공을 시작합니다. 독일 전투기와 폭격기가 소련군의 비행장을 기습공격을 하는데, 미처 대비가 되지 않았던 소련은 하루 만에 1,200대가량의 항공기 손실을 입게 됩니다. 이렇게 제공권을 빼앗은 독일의 진격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당시 독일군이 자랑하던 전격전은 일사천리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투경험이 거의 전무했던 당시 소련군의 지휘관들은 닥치는 대로 병력을 모아 정면 공격을 하였고, 그야말로 처참한 몰살에 가까운 패배를 맛보게 됩니다. 그렇게 독일군은 1차 작전 목표를 이루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독일군의 첫번째 목표는 국경에 있는 소련군을 붕괴하는 것이었죠.

 


[사진출처 :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5096774]

그렇게 소련을 침공하기 시작한 독일군은 초반 3개의 집단군으로 나뉘어 진군하게 됩니다.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북부 집단군, 모스크바로 향하는 중부 집단군, 그리고 키예프로 향하는 남부 집단군으로 나뉘어 진군하였습니다. 키예프로 향하는 남부집단군의 목표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자원과 석유를 확보하는 것이었고,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밀집해있는 산업시설을 장악하는 것, 그리고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북부집단군의 목표는 에스토니아 및 기타 지역의 해안 지대를 장악함으로써 항구와 제해권을 장악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로 인해 중부 및 남부집단군에게 지원되어야 할 군수물자 수송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속전속결로 소련침공을 끝내려고 한 계획의 배후에는 소련의 군사시설 및 군사능력을 초기에 증발시켜, 소련 군부내에서의 반란을 도모해 소련 정권을 붕괴시키고 소련 내에 친독 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진출처 : https://kimssine51.tistory.com/1074]

비록 소련침공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지만 진격 초반 세 개의 집단군으로 나눈 진격은 9월 1일 첫번째 목표를 달성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6월 22일에 침공을 시작해, 9월 1일, 2달 반만에 1,500km 진군에 성공한 것이죠.

 


[사진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ZZfjummpS7Y]

중부집단군의 진격 루트인 바르샤바-브레스트-민스크-스몰렌스크로 이어지는 루트는 과거 나폴레옹이 진격했던 루트와 동일하였습니다. 스몰렌스크까지 진격한 독일군이 바로 모스크바로 진격을 하였으면 10km만에 모스크바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는 전쟁을 준비하면서부터 늘 머릿속에 고민하고 생각해오던 것이 있는데, 바로 과거 나폴레옹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진격전을 통해 속전속결로 소련 침공을 마무리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장기화를 고려하지 않았던 독일군은 겨울전쟁에 대해서 대비하지 않았던 것이죠. 겨울의 혹한의 추위와 군수물자 보급, 임금문제 등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죠.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pzkpfw3485/2242972]

군수물자 보급을 위해 독일군은 소련군의 열차를 노획해서 사용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당시 독일과 소련의 열차의 규격과 선로의 규격은 달랐기 때문에 독일의 열차를 소련 내에서 바로 이용할 수 없었고, 개량을 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소련군의 열차 노획을 노렸는데, 스탈린은 이미 사전에 서부지역에 있는 산업시설을 동부지역으로 옮겼기에 열차 노획에 실패하게 되고 군수물자 보급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열차를 개량하지만 추위로 인해 열차의 사용이 어려웠고, 차량을 통해 육로로 보급을 하여야 했습니다. 이때 1,600km에 달하는 거리를 차로 이동하는 경우에 많은 문제가 산재하였습니다. 추위와 여러가지 문제점으로 인해 물자 수송을 하면서 수송 경비병의 1/3이 사망하게 되는데요, 이는 웬만한 전쟁에서 사망하는 수치보다 높은 비율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의 소련 침공은 동장군, 추위에 패배한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실제로는 보급 수송망 유지에 실패한 것이 더 큰 패착으로 여겨지는 것이죠.

 


[사진출처 : http://egloos.zum.com/TransUral/v/269574]

사실 소련 침공에 가장 큰 적은 겨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겨울의 추위, 봄에는 그 얼음과 눈이 녹으면서 땅이 진창이 되어서 진격에 어려움을 겪게 되죠. 그래서 여름에 진격을 하게 되는데, 여름에는 폭염이 아니라 사실 먼지가 문제였습니다. 먼지로 인해 기갑부대, 기관차와 탱크 등의 엔진이 쉽게 고장이 났던 것입니다. 때문에 9월 1일 1,500km 진군에 성공을 했던 것은 한계선으로 보여지는 것이죠. 이 당시 기갑부대의 전투력은 1/10로 감소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독이룬은 늪에 빠져버리고 말았던 것이죠. 이러한 어려움과 3개 진격군으로 나뉜 부대의 사정으로 인해 10km를 앞둔 모스크바 점령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겨우 모스크바 교회에 도달하게 되지만, 전투력은 거의 ‚0‘에 가깝게 됩니다.

 


[사진출처 : https://kimssine51.tistory.com/1074]

 

독소전쟁의 2막은 이제 시작인데요, 독일군의 승리로 보였던 바르바로사 작전은 실제로 성공으로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서부전선이 대패하고 물러났지만,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동부전선에 있던 병력이 동부전선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소련 전역의 2,500만 예비군들이 동부전선으로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넓고 광활한 영토로 인해 초기에 병력을 모으기는 힘들지만, 모이기 시작하면 그 병력을 어마어마했던 것입니다. 또한, 동부로 옮겨놓은 산업시설에서 무기의 생산 또한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죠. 더군다나, 미국이 소련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사진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umiun&logNo=220479380109&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그렇게 독소전쟁 2막이 시작되고 1943년 1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독소전쟁 2막, 스탈린그라드 전쟁은 다음 포스팅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여기까지 독소전쟁 1막,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전체적인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내용은 아래 포스팅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포스팅 – 제 2차 세계대전, 다방면에 걸친 그 이야기 속으로]

https://herr-kwak.tistory.com/286

 

제 2차 세계 대전. 다방면에 걸친 그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자.

독일 하면 아직까지 빼놓을 수 없이 연계되는 이미지는 세계 대전의 패망국이자 주축국이라는 것인데요. 아돌프 히틀러라는 희대의 독재자를 배출한 그 제2차 세계 대전. 수많은 사전 원인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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