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r.Kwak_일상/독일에서 이모저모

[피비린내나는 역사상 최대 사상자를 낸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자.

o헤어곽o 2021. 2. 18.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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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kdudtn722&log]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그라드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군과 추축군의 대격전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베르됭 전투가 있었다면 제2차 세계 대전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요, 두 전투 모두 독일의 공세로 시작되었으며 독일이 승리 직전까지 갔다가 역습을 받고 패퇴했다는 점. 그리고 방어하는 쪽이 더 많은 병력을 잃었지만 결국 승리했다는 점에서 매우 흡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가 규모면에서 세계 최대의 전투라면,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최대 규모의 사상자를 낸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는데요, 이 전투에서 추축국은 80만 명, 그중 독일군은 40만명 정도가 사망하였습니다. 반면에 소련군 사상자는 1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이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무수한 전투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공방전입니다. 민간인 희생자들을 포함해서 무려 2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온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 막대한 피해를 남긴, 그리고 이 2차 대전의 향후 전세를 역전시키는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Battle of Stalingrad]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독일의 청색 작전에 대해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독일의 남방 집단군은 코카서스의 유전 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러시아 남부의 스텝 지대를 꿰뚫는 공세를 시작하였는데요, 히틀러에게 유전 지대의 점령은 다른 장군들이 권고하는 모스크바 점령보다 더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에, 러시아 남부 전선에 더 많은 병력과 지원을 하였습니다. 여름 공세의 암호명이 바로 “청색 작전”(Fall Blau)이었고, 여기에는 독일 6군, 17군, 4기갑군, 1기갑군이 참가하였습니다.

히틀러는 작전에 참견해서 집단군을 두 개로 나누었습니다.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는 남부 A집단군은 제17군과 제1기갑군과 함께 코카서스로 진격을 계속하도록 했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제6군과 호트의 4기갑군을 포함하는 남부 B집단군은 동진하여 볼가 강 연안의 스탈린그라드를 공략하도록 하였으며, B집단군은 막시밀리안 폰 바이크스가 지휘하였습니다. 청색 상황의 원래 이름은 지크프리트 작전(Unternehmen Siegfried)이었습니다. 하지만 1942년 4월 5일, 히틀러는 이 작전명을 청색 작전으로 바꾸고, 각 부대에 명령서를 하달하였습니다. 이 작전은 아래와 같이 4단계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나, 보로네시를 점령하여 측면에서의 소련군의 위험을 제거한다.

둘, 돈 강을 도하하여 돈 강 너머의 소련군을 격파한다.

셋,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여 철로를 점거한다.

넷, 소련 남부 코카서스 유전 지대를 장악하고, 이란 국경까지 진격한다.

 

청색 상황의 개시일은 원래 1942년 5월이었는데, 이 작전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던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이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포위에 참가 중이었기 때문에 6월에 세바스토폴이 함락될 때까지 몇 차례 연기되었습니다. 이후 청색 작전은 최종적으로 6월 28일에 개시되었습니다. 독일군의 공격은 처음에는 성공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소련군은 넓디 넓은 초원에서 저항을 거의 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패주를 시작하였고, 소련군은 7월 2일 하르코프 북방의 포위망과 일주일 후 밀레노보와 로스토프 근방의 포위망에 갇혀 각각 섬멸되었습니다.

그동안 헝가리 제2군과 독일 제4기갑군은 보로네시 공세를 개시하여 7월 5일 함락시켰습니다. 스탈린그라드를 향하는 B집단군의 초기 진격은 매우 순조로워 히틀러는 이에 소속된 제4기갑군이 코카서스로 동진하는 A 집단군에 합류하도록 명령하였죠. 이는 6군과 4기갑군이 같은 도로를 사용하게 되어 지역의 부족한 도로 사정과 맞물려 대규모의 교통 정체를 야기하였습니다. 최소한 1주간의 진격이 지체되었고, 이렇게 되자 히틀러는 다시 마음을 바꿔 다시 4기갑군에게 스탈린그라드 공략에 합류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사진출처 : https://de.wikipedia.org/wiki/Fall_Blau]

 

7월의 하순까지 독일군은 소련군을 돈 강까지 밀어붙였다. 이 시점에서 독일군은 동맹국인 이탈리아군, 헝가리군, 루마니아군을 이용하여 방위선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로부터 수십 킬로미터까지 접근했고 그들의 남방에 있던 4기갑군은 시의 공략을 위해 북방으로 진격로를 돌렸으며, 남방에서는 A집단군이 코카서스를 향해 돌진 중이었으나 진격 속도는 둔화되었습니다. 이로써 독일군의 의도는 소련군 지휘관들에게 분명하게 전달되었습니다. 소련군의 7월 작전 계획은 스탈린그라드를 방위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독일군의 공세 앞에 동쪽으로 후퇴하던 소련군 부대는 스탈린그라드에 진입하도록 명령을 받았고, 스탈린그라드의 동쪽은 폭이 넓은 볼가 강이었고, 강을 넘어 다른 소련군 부대들이 배치되었습니다. 이런 부대들이 새로 62군으로 재구성되었고, 인근의 64군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을 이루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은 안드레이 예료멘코 대장이 지휘했고, 시내에 포진한 62군은 처음에 로파틴 중장이 사령관이었으나 그가 수비에 비관적이었고 병력을 볼가 강 너머로 후퇴시켰기 때문에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소련군의 목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스탈린그라드 시를 사수하는 것이었죠.

 


[사진출처 : https://www.britannica.com/event/Battle-of-Stalingrad]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시가에 대한 독일 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도심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는데요, 스탈린은 방위 부대의 사기를 위해 민간인이 시를 떠나 피난 가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피난 행렬이 방위 부대의 소통에 방해되면 안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고 합니다.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이 방위망을 구성하기 위해 동원되었으며, 8월 23일 단 하루의 대규모 폭격으로 많은 인명이 죽고 많은 건물이 돌과 잿더미로 변하였습니다. 이날 독일 공군 폭격기 600대가 도시에 공격을 개시해서 불지옥으로 만들었고, 시민 약 4만여 명 이상이 사상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초기상황에서 소련군의 초기 방어 임무는 제1077 방공 연대가 맡았는데, 이 부대는 주로 고사포를 보유하여 지상 목표에 대한 교전법은 거의 훈련받지 않은 여성 지원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부대원들은 그들의 위치를 고수하여 진격해 오는 독일 전차와 교전하며 선전하였습니다. 전투의 초기에는 직접적으로 군수 물자를 생산하지 않는 노동자들이 대거 도시 방위에 참가하였습니다. 한동안 탱크는 계속 시내의 공장에서 생산되었고, 도색도 되지 않거나 조준경도 없는, 갓 출고된 탱크를 공장 노동자 가운데 자원자들이 몰고 전선에 나갔습니다. 8월 하순까지 독일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볼가 강에 이르렀고, 남쪽을 향한 다른 진격도 이어졌습니다. 9월 1일까지 소련군은 독일군의 포병과 폭격에 노출되어 위험한 볼가 강 도하를 통해서만 스탈린그라드 내의 부대들에게 보급과 지원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zkpfw3485&logNo=220573806829&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이어진 전투는 이 도시에 처음 도착한 소련군 사병의 평균 예상 생존 시간은 24시간 미만이었을 정도로 치열했고 잔혹했습니다. 1942년 7월 27일에 내려진 스탈린의 227호 명령에 따르면 상부의 명령 없이 위치를 벗어나는 모든 자는 즉결 처분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독일군의 군사 원칙은 기갑, 보병, 공병, 공군의 지상 지원이 잘 조화된 협공 작전이었습니다. 소련군은 여기에 대응하여 항상 독일군에게 가능한 가깝게 근접전을 시도하였죠. 이런 전법 때문에 독일군 보병은 홀로 화력 지원 없이 싸우거나 혹은 아군의 화력 지원에 따른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 전법은 독일군의 근접 지상 지원과 포병 지원을 무력화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마마이 언덕이었습니다. 이곳은 주인이 수없이 바뀌었다. 어떤 반격 때에는 소련군이 하루에 1개 사단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전투는 여기서 몇 주간 계속되었는데 독일군이 최후로 적을 소탕했을 때 겨우 40구의 소련군 시체를 발견하였습니다. 시의 다른 부분에서는 야코프 파블로프가 지위하는 소련군 소대가 한 아파트 빌딩 전체를 요새화하였습니다. 이 빌딩은 시의 중앙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는데요, 병사들은 이곳을 지뢰밭으로 둘러싸고 창문에 기관총을 배치하였고, 지하실의 벽에 틈을 내어 통신을 용이하게 하였습니다. 이 빌딩은 나중에 “파블로프의 집”이라고 불렸습니다.

양군의 손실은 막심했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부대가 시내로 투입되었습니다. 특히 소련군은 수천 킬로미터 밖의 시베리아나 극동에서 지원군을 끌어오기도 했고, 심지어는 해군의 수병까지도 동원하였습니다. 독일군은 돌파구가 보이지 않자 중화기를 시에 배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소련군도 독일군이 도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볼가 강 동안에 대규모의 포병을 배치하여 독일군을 계속 포격하였죠. 독일군의 전차는 높이가 8미터가 넘는 폐허 더미 속에서는 쓸모가 없었으며, 더군다나 소련군은 부서진 빌딩에 대전차포를 엄폐해 두었다가 전진해 오는 독일군 전차를 공격하였습니다.

 

[사진출처 : https://twin-h.tistory.com/157]

 

소련군 저격수도 교묘히 폐허를 이용하여 독일군에게 큰 손해를 입혔는데, 가장 유명한 저격수는 제1122 보병연대의 이반 시도렌코로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500명을 사살하였습니다. 다른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도 전투 기간 중 242명을 사살하였습니다.

스탈린과 히틀러에게 스탈린그라드는 실제 전략 목표보다 더 중요한 최우선 과제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소련군 최고 사령부는 전략 예비군을 모스크바 방면에서 볼가 강 저지로 이동시켰고, 항공기도 모든 지역에서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동원하였습니다. 양군의 지휘관들은 막대한 긴장에 시달렸습니다. 독일군 지휘관 파울루스는 눈가에 심한 경련이 생겼고, 추이코프는 습진 때문에 양손을 붕대로 완전히 감쌀 정도라고 전해지며, 양측의 병사들도 근접 전투가 야기하는 심한 긴장감 속에 지내야만 했습니다.

 


 

[사진출처 : http://m.chosun.com/svc/article.html?sname=premium&contid=2014110501562]

 

그해 가을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스탈린그라드 방면의 전략적 작전 지도를 맡은 바실레프스키와 주코프는 시내로 병력을 축차 투입하는 것으로는 독일군을 격퇴할 수 없음을 깨닫고 대규모 공세를 통해 전세를 뒤집으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 일방적 공세 작전을 제안하였습니다. 작전 계획은 독일군을 시내에 붙잡아두고, 양 측면을 공격하여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포위하는 것이었죠. 이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시에는 겨우 거점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만 병력을 지원했고, 시의 서북쪽과 서남쪽의 스텝 지대에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작전은 “천왕성 작전”으로 명명되었으며, 독일 중앙 집단군을 겨눈 화성 작전과 함께 실시될 예정이었습니다. 독일군은 특히 북쪽 좌익이 허점이었는데, 이곳은 독일군에 비해서 잘 훈련되지 못하고 변변한 장비와 무기도 부족한 데다 사기도 엉망인 크로아티아군과 헝가리군, 루마니아군이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이 가능할 때마다 독일군 대신 주로 약한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돌파구를 뚫었듯이, 소련군도 이러한 점을 이용해서 비(非)독일 추축군을 공격 목표로 삼았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7/77/Operation_Uranus.svg]

 

11월 19일 소련군은 드디어 천왕성 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3개 야전군(1근위, 5전차, 21군)으로 이루어진 남서 전선군이 바투틴 대장의 지휘를 받으며 북쪽에서부터 내려오기 시작하였죠. 남서 전선군은 총 18개 보병 사단과 8개 전차 여단, 2개 자동차화 여단, 6개 기병 사단, 1개 대전차 여단의 대병력을 보유하였으며, 이 부대는 독일 제6군의 북쪽 측면을 수비하던 루마니아군을 겨누었습니다. 루마니아군은 이전부터 계속 독일 측에 증원과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이는 거부되었습니다. 소련군의 맹공 앞에 병력도 열세였고 장비도 불충분했던 루마니아 제3군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습니다. 11월 20일에서는 남쪽 방면에서도 두 개의 야전군으로 이루어진 로코소프스키 중장 지휘하의 돈 전선군의 공세가 시작되어 보병만으로 이루어진 루마니아 제4군단을 분쇄하였으며, 두 갈래의 전선군은 이틀 후 스탈린그라드 서쪽 칼라치에서 만나 독일 제6군을 둘러싸는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였습니다.

 


 

[사진출처 : https://weaponsandwarfare.com/2018/03/09/luftflotte-4-5-july-1943/]

 

11월 23일 소련군의 협격 포위로 25만여 명의 독일과 루마니아군 그리고 약간의 크로아티아 출신의 의용병 부대가 거대한 포위망에 갇혀있었습니다. 포위망 안에는 또한 1만 명에 달하는 소련 민간인과 전투 중에 독일군이 잡은 수천 명의 소련군 포로가 있었죠. 이러한 가운데 제4항공 함대 (일명 루프트바페 : Luftflotte 4)의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이 계획의 번복을 요청했지만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독일 제6군은 공중 보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6군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단위 부대였으며 거의 정규 독일 야전군의 두 배의 규모였습니다. 게다가 제4기갑군의 한 개 군단도 함께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고립 지대에 대한 공중 보급이 불가능함은 명백했죠. 독일 공군의 수송 능력은 크레타 전투 이후 증원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일일 수송 가능량은 최대 300톤 정도였지만, 고립 지대 안의 일일 필요 보급량 500톤은 수송 가능량을 훨씬 능가하는 수량이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괴링의 계획을 지지했고, 포위망 안의 부대에 “항복 절대 불가”의 명령만을 반복하였죠 공중 보급 계획은 즉각 실패로 드러났습니다. 우선 괴링이 동원할 수 있는 항공기 대수가 적었습니다. 당시 독일군은 융커-52형 약 180대, 하인켈-111형이 100대 미만, 여기에 몇 대의 융커-86형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소련군의 밀집된 대공 포화와 전투기는 독일 공군의 수송기들에 심한 손실을 입혔죠. 게다가 제6군 점령 지역에는 작은 비행장이 2곳뿐이었고 그 상태도 극히 나빴습니다. 또한 악천후도 독일군의 수송 효율을 저하시켰죠. 첫 공수를 시작한 48시간 동안 독일 공군이 제6군에게 보낸 물자는 불과 130톤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나쁜 조건들도 모자라는 듯 공군은 그 특권을 고집하여 육군의 보급 담당 장교에 의한 공수 화물의 확인을 거부하였죠. 그 결과 웃지 못할 실책이 저질러졌는데요, 어느날 4톤의 박하와 후추가 도착했습니다. 이러한 실수는 계속되어 12월 9일, 1일당 평균 공수량이 최저 필요량인 500톤의 5분의 1도 되지 않는 84.4톤으로 떨어졌고, 이날 제6군 병사 2명이 굶주림 때문에 목숨을 잃어야만 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www.welt.de/geschichte/zweiter-weltkrieg/article112139523/In-Stalingrad-hoerte-man-schon-die-Retter.html]

 

안전하게 도착한 수송기는 돌아올 때 사령부에서 재능이 있다고 판단된 지휘관들이나 기술적 전문가들 및 부상병을 날라 왔습니다. 제6군은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고, 조종사들은 도착한 물자를 나르는 병사들이 너무 지치고 굶주려서 음식을 나를 수 없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독일 총참모장 자이츨러는 스탈린그라드의 고난에 충격을 받아서 스스로 음식을 줄였다고 합니다.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주위의 위치를 공고히 했고, 포위망을 줄이기 위한 전투를 개시하였습니다. 12월 포위를 모면한 독일 제4기갑군을 주축으로 구성된 돈 집단군은 만슈타인 지휘 하에 포위된 독일군을 구출하기 위해 “겨울 폭풍 작전”(Unternehmen Wintergewitter)을 개시하였으나 소련군은 이를 격퇴하였습니다. 이후 다시 한번 혹독한 러시아의 동장군이 찾아와 볼가 강이 결빙하여 소련군의 보급은 쉬워졌으나, 시내에 포위된 독일군은 식량, 난방 연료, 의약품 부족에 시달렸고, 수많은 병사가 동상, 영양실조, 질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사진출처 : https://ko.topwar.ru/132509-operaciya-malyy-saturn-kak-razgromili-8-yu-italyanskuyu-armiyu.html]

 

12월 16일 소련군은 다시 두 번째 공세인 토성 작전을 개시하였는데요, 이것은 추축군을 돈 강 너머로 몰아내고 로스토프를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성공한다면 코카서스를 향해 진격하던 독일 A집단군까지 포위가 되어 독일의 남부 집단군 전체가 붕괴하는 꼴일 뿐이었죠. 독일군은 대규모 지원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남아 있는 소규모 부대로 “기동 방어”를 시도하였습니다. 소련군은 로스토프에 근접하지 못했지만, A 집단군을 코카서스로부터 후퇴시켰고, 만슈타인으로 하여금 스탈린그라드에서 250킬로미터 후방으로 물러서게 하였습니다. 게다가 소련군이 독일군의 공항을 겨눈 타친스카야 기습이 성공하여 독일 공군의 수송 능력은 상당히 감소되었습니다. 이로써 독일 제6군은 모든 구원군의 희망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제6군에게 이를 알리지 않고, 계속 희망을 가지고 위치를 고수하였습니다. 몇몇 독일군 장교는 파울루스에게 위치를 고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고 포위망을 뚫어 스탈린그라드를 탈출하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명령 불복종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포위망 돌파는 포위 초기 몇 주에는 가능했지만, 그 이후에는 연료가 부족하여 불가능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기아에 허덕이던 독일군이 혹독한 소련의 겨울에 걸어서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사진출처 : https://blog.daum.net/himnom/15523042]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은 소련군의 맹공 때문에 시의 외곽으로부터 시내로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공중 보급이 이루어지던 피톰닉과 굼락크 두 공항을 잃어버리게 되었죠. 독일군은 이제 기아에 허덕일 뿐만 아니라 실탄도 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독일군은 소련군이 포로를 처형할 것이라는 생각에 결사적 항전을 계속하였죠. 특히 히비라고 불리는 소련군 출신 독일 부역자들은 잡히면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결사적이었습니다. 그들을 공격하던 독일군을 역(逆) 포위한 소련군은 포위망을 강화하여야만 했습니다. 다시 한번 피비린내 나는 시가전이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독일군이 볼가 강 강둑으로 밀려났습니다.

이후 1943년 1월 소련군은 모든 포로에 대한 안전 보장, 독일군 환자와 부상병에 대한 의료 지원, 포로의 개인 소지품 소지 허가, 정규 식량 지급, 전쟁이 끝난 후 송환 등의 조건을 내걸고 파울루스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습니다. 또한 이는 심리전 차원에서 선전 전단으로 만들어져 포위된 독일군에게도 뿌려졌습니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고 다시 전투가 재개되었습니다.

1월 20일 크로아티아 의용군 부대를 이끌던 빅토르 파비치치가 전사하고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자신의 집권 10주년 기념일인 1월 30일에 원수로 승진시켰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포로가 된 독일의 원수가 없었음을 상기시키며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자결하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해석이 됩니다. 하지만 다음 날 소련군이 폐허가 된 백화점 건물에 차렸던 사령부로 진입하자, 파울루스는 이런 히틀러의 기대를 저버리고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사진출처 : https://pjhollis123.medium.com/the-battle-of-stalingrad-c3760f145241]

 

이로써 피비린내 나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막이 내리게 됩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전투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 전투는 199일간 지속되었는데요. 전투의 범위가 광대했고, 사상자 수가 지나치게 많을 것을 두려워 소련 정부의 금지 때문에 정확한 집계도 어려웠다고 전해집니다. 독일군 측에서는 독일이 40만 명, 루마니아가 20만 명, 이탈리아가 13만 명, 헝가리가 12만 명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본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전투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9만 명도 1943년 봄에 대부분 티푸스로 사망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소련에 억류되어 전후 복구 사업에 강제 동원되다가 최종적으로 1955년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자는 5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독일도 소련군 포로를 가혹하게 다루긴 마찬가지였죠. 5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 출신 독일 부역자(히비(Hiwi))들도 소련군에 사살되거나 잡혀 처형되었습니다.

영웅적인 방어전을 기념하여 스탈린그라드는 1945년 영웅 도시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전후 1960년대에는 시를 내려다보는 마마이 언덕에 “모국 러시아”를 상징하는 거대한 입상이 세워졌죠. 이 근처에 스탈린그라드 전투 기념관이 세워졌으며, 오늘날까지 당시에 부서졌던 건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곡물 저장소와 2개월간 독일군의 포위에 견딘 파블로프의 집도 보존되어 현재까지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이들은 전투의 치열함과 독일 침략자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제2차 대전의 대표적인 피비린내 나는 사상 최대의 사상자를 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전체적인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내용은 아래 포스팅에서 확인하세요.

herr-kwak.tistory.com/286?category=883691

 

제 2차 세계 대전. 다방면에 걸친 그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자.

독일 하면 아직까지 빼놓을 수 없이 연계되는 이미지는 세계 대전의 패망국이자 주축국이라는 것인데요. 아돌프 히틀러라는 희대의 독재자를 배출한 그 제2차 세계 대전. 수많은 사전 원인들과,

herr-kwak.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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