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r.Kwak_일상/독일에서 이모저모

독일의 역대 연방총리 (연방수상)

o헤어곽o 2020. 8. 28.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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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앙겔라 메르켈에 이르기까지, 1949년 초기 1대 독일 연방수상 콘라트 아데나워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1대. 콘라트 아데나워 (Konrad Adenauer) - 임기 1949~1963년 - CDU(기민련) 소속

[사진출처 :  https://www.planet-wissen.de/geschichte/persoenlichkeiten/konrad_adenauer/index.html]

 

콘라트 아데나워는 독일연방공화국(당시는 서독)의 초대 총리로,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총리직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미국-영국-프랑스와의 관계정상화를 통해 독일이 전범국가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나는데 이바지하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사실상 현대 독일의 시작을 연 정치인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당시 서독에 뿌리내렸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최근 ZDF에서 조사한 설문에서 독일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1위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아데나워 이전에 독일에 자유민주주의가 시행되었던 시기는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하에서 이뤄진 1920년대의 10여년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 하에서 이뤄진 사실상 국왕/황제 중심의 전제군주제 국가였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위기 이후에는 패전과 경제적 불황, 그리고 바이마르의 혼란이 불러들인 나치에 의해 히틀러 1인/나치당 1당 독재 체제가 들어서고 말았죠.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 하의 10년도 스파르타쿠스단 봉기와 여러 사회-정치적 사건들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독일의 중심은 토지 귀족이자 군 장교들인 융커들이었고, 독일이라는 사회 자체가 귀족과 군부 중심의 병영 국가였고, 국가에 의한 강력한 경제 통제가 시행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만 해도 상당수 독일인들에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것은 잠시간 시행된 적은 있었지만, 그리 매력적이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체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데나워는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민심이 흉흉한 독일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정착시키는데 성공했고, 독일은, 이전의 다른 독일 국가들과는 다른, 건강한 시민 사회가 주도가 되어 다양한 사회적 목소리를 정치와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로운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이후 다시금 서유럽과 국제 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전후 복구 기간, 보수세력의 불만을 억누르면서까지 일명 사회적 시장경제를 주창하여, 시장 자유주의에 입각한 시장 자유화를 통한 경제적 성장에 힘을 쓰는 한 편, 사회 복지주의에 입각한 복지국가론을 추구하며 성장과 분배 둘 다에 큰 성공을 이뤘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현재까지 독일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으며, 에르하르트 총리, 빌리 브란트 총리 등과 더불어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각지에 콘라드 아데나워 가(街)/광장도 많이 있으며, 독일 기민당의 현 당사명은 콘라트-아데나워 하우스(Konrad-Adenauer Haus)이고, 독일 총리 전용기(A340-313X VIP)의 이름도 콘라트 아데나워 호라고하니 그 존경과 예우를 느낄 수 있습니다.

 


 

2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 - 임기 1963~1966년 - CDU(기민련) 소속

[사진출처 :  https://www.dw.com/en/a-visit-with-ludwig-erhard-father-of-germanys-economic-miracle/a-50448978]

 

 

에르하르트는 독일연방공화국(구 서독)의 제2대 총리로,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아데나워 내각 하에서는 경제부 장관으로 일명 라인강의 기적을 주도하면서 명성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콘라트 아데나워의 후계자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총리 시절엔 그의 반대편에 있었던 아데나워와의 당내 정치 투쟁에 시달려야 했고, 불운도 겹쳐 집권 기간 불어닥친 경제 지표 악화 등으로 인해 지지율이 하락하여 불과 3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밖에 재임하지 못하는 등 여러모로 불운이 따른 정치인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는 Wohlstand fuer Alle(모두를 위한 번영)이란 슬로건을 내세우며 독일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오죽하면 사민당 또한 1959년에 100년 가까이 당의 강령으로 삼아온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사회적 시장경제를 인정하기로 결정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높은 기대 속에 총리 자리에 오른 에르하르트의 집권기는 그다지 순탄하지 못하였습니다. 취임 직후 경제 침체기가 오면서 경제부 장관으로 그가 누렸던 인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렸고, 외교 문제에 당내 장악력까지 불안하다 보니 불과 3년 만에 그는 총리직에서 내려와야만 하게 된 것이죠. 그가 총리로서 단명했던 이유는 크게 분류하자면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로 대통령보다 훨씬 강한 여당 내부 장악력을 가질 필요성을 요구받는 게 내각책임제의 총리 자리이지만 그는 당내 기반이 그리 튼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로는 외교문제를 들 수가 있습니다. 이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그 위신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고, 유럽에서는 우리만의 마이 웨이를 가자는 드골 주의가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르하르트는 대서양주의라고 불리던 그의 친미 행보를 꿋꿋이 이어나갔고, 당연히 이는 많은 반발, 특히 아데나워가 여전히 장악하고 있던 여당 기민당 내에서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에르하르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바로 아이러니하게도 경제 문제였습니다.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독일의 경제성장률은 한 자릿수 후반대에서 초반대로 떨어졌고, 반대로 실업률은 0%에서 2~3%로 오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1966년 약간의 불경기와 더불어 예산 부족 문제가 발생하자 에르하르트는 증세를 결정하였지만, 이와 같은 그의 결정에 반발하여 당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자민당 소속의 장관들이 모두 사임을 하였고, 기민당과 자민당의 연정은 붕괴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3대 -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Kurt Georg Kiesinger) - 임기 1966~1969년 - CDU(기민련) 소속

[사진출처 :  https://www.willy-brandt-biografie.de/wegbegleiter/h-k/kiesinger-kurt-georg/]

 

 

키징어는 서독의 제3대 총리로, 정반대 성향의 기민당과 사민당을 하나의 정부로 묶는 대연정의 과정에서 보여준 뛰어난 언변과 중재술로 유명합니다. 다만 나치당에 가입해서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외무부에서 근무한 기록 덕분에 두고두고 비난을 받았으며,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제2, 제3 정당이었던 사민당과 자민당이 단결하여 연정을 구성하는 바람에 총리직에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에빙엔에서 태어난 그는 베를린으로 진학하여 변호사가 됩니다. 그리고 1933년 히틀러가 총리로 집권하고 몇 주 뒤, 평생을 논란으로 따라다니게 될 선택을 하게 되는데, 바로 나치당에 입당한 것입니다. 자신의 회고록에서 키징어는 이 선택에 대하여 나치의 탄압을 피하는 한편으로, 안에서 나치의 이데올로기, 특히나 반유대주의를 변화시키기 위해 입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진실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다고 합니다. 이후 키징어는 징집을 피해 외무부의 대외 선전부에서 활동을 했고, 종전 뒤 다른 나치 부역자가 그랬듯이 재판을 받았지만 단순 가담자로 판단되어 곧 풀려났습니다. 이 시기 그의 행적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따르지만, 적어도 그가 열혈 나치 지지자가 아니었다는 점은 확실해 보이는데, 그의 동료가 힘러에게 보낸 투서에서 키징어가 패배주의에 물들어 있고 반유대주의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방해까지 하고 있다는 내용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명확한 진실은 키징어가 나치당원이었다는 점 하나이고, 일각에서는 중재의 달인이었던 그의 모습을 바탕으로 "키징어는 나치와도 타협을 했다."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총리를 맡은 이후 키징어는 2년 10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부임을 하였고, 그의 집권 기간은 역대 독일 총리 중에서는 가장 짧은 편이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전임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와 후임 빌리 브란트 총리가 워낙 먼치킨스러운 성과를 남겼기에 상대적으로 그의 위상과 업적은 초라해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를 잊혀진 총리(Der Vergessene Kanzler)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라고 하니까요. 그렇지만 그와 그의 대연정 내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법안 통과를 이끌어내면서 에르하르트 시기 정체됐던 경제 성장률을 다시 회복시키고 실업률도 낮추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오늘날 인정받고 있습니다.

 


 

4대 - 빌리 브란트 (Willy Brandt) - 임기 1969~1974년 - SPD(사민당) 소속

[사진출처 :  https://www.willy-brandt-biography.com/]

 

 

앞선 키징어는 대놓고 선거 기간에 "자민당을 의회에서 쫓아내 버리겠다"라고 공언하고 다녔고, 키징어 내각이 내세운 핵심 공약 중 하나가 독일식 비례제를 철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역구로 의원을 배출할 능력이 없던 자민당 입장에서 키징어의 재집권은 사실상의 사형 판결이었습니다. 이때 브란트는 이 틈을 이용해 자민당과 연정을 구성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사실 총선 전부터 발터 셸이 자민당 대표로 선출된 이후 자민당의 노선은 기민/기사련보다 사민당에 더 가까워진 상태였죠. 다급해진 키징어는 내각의 절반을 자민당에 내주겠다고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빌리 브란트는 서독이 수립된 이후 첫 사민당 출신 총리로 취임하게 됩니다. 1930년 헤르타 뮐러가 퇴임한 지 40년 만이었다. 그는 콘라트 아데나워 이래로 독일 정부가 고수하고 있던 "동독과 수교를 맺고 있는 국가와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적극적으로 공산권과의 교류협력을 추진하는 '동방정책'을 표방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소련 및 동구권 공산권 국가와의 긴장관계를 완화하고 커다란 외교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추념비에서 참회의 무릎을 꿇은 사건으로 유명합니다. 일명 브란트의 무릎 꿇기(Brandt Kniefall)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당시 헝가리의 뉴스 캐스터는 "무릎을 꿇은 것은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민족이었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의 행동에 극찬을 하였습니다. 사실 브란트 총리가 추념비를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폴란드인들은 서독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죠.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내내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해서 엄청난 고초를 겪은 데다가, 참혹한 독일과 소련의 전투 와중에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도 폴란드와 독일 간의 국경선은 여전히 쟁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반가워할 리가 없었는데,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인 와중에 추념비에서 갑자기 무릎을 꿇은 장면을 생방송으로 지켜본 뒤에는 서독에 대한 감정이 많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브란트는 보수우익을 포함한 많은 국민들에게 매국노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왜냐면 과거 영토의 소유권을 자기 멋대로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브란트의 행각에 대해 거센 반발에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조상 대대로 수백 년간 살아온 땅을 브란트 자신의 인기를 위해 마음대로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격앙된 반응도 있었습니다. 일각에서는 2년 뒤에 열리는 1972 뮌헨 올림픽을 앞두고 유대인들과 동구권 국가 등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독일 통일의 기틀을 다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물론, 독일 통일은 1990년 기독교 민주연합 헬무트 콜 총리의 재임 시절에 이루어졌지만, 빌리 브란트가 시작하고 헬무트 슈미트가 계승한 동방정책과 동독과의 끊임없는 교류 추진이 없었다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시선이 지배적입니다. 이런 대외정책으로 인해 연정 파트너 자민당 내 일부 세력의 반발로 하마터면 불신임을 받을 뻔했지만 2표 차이로 극적으로 총리직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 1974년 자신의 비서 귄터 기욤과 그의 부인 크리스텔 기욤이 동독의 간첩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많은 독일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합니다. 조사 결과 귄터 기욤이 동독에 넘긴 자료들 중에 국가 안보에 위해가 될만한 정보는 밝혀지지 않았고, 브란트는 기욤 사태와 자신은 직접적으로 무관하다고 주장하면서 총리직 사퇴 요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귀욤이 동독에 넘긴 자료에는 브란트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것이 많았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죠. 브란트는 자신은 간첩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서 총리직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설상가상으로 연방범죄청의 수사과정에서 브란트의 섹스스캔들, 심한 음주 행각 등이 추가로 드러나게 됩니다. 브란트의 섹스 중독을 만족시키기 위해 귄터 기욤이 수시로 브란트에게 매춘부를 공급했던 것입니다. 브란트가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외에 순방을 나갔을 때도 귀욤은 브란트에게 계속 창녀를 공급해야만 했습니다. 이에 소속당인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브란트의 실추된 이미지로는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브란트를 내치고 슈미트를 차기 총리로 내세우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합니다. 사민당 지도부는 총리직에서 내려오지 않고 버티고 있던 브란트에게 동독이 섹스 스캔들 자료를 압박 수단으로 삼을 것이라며 사임 압력을 가했고, 결국 이를 버텨내지 못한 브란트는 4년여 만에 총리직를 사임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브란트는 기욤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심한 우울증으로 총리직을 수행하기 어려워 사퇴한다고 발표했습니다.

 


 

5대. 헬무트 슈미트 (Helmut Schmidt) - 임기 1974~1982년 - SPD(사민당) 소속

[사진출처 :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Helmut-Schmidt]

 

 

1974년 빌리 브란트는 슈타지의 요원이 간첩임무를 맡고 자신의 비서로 활동한 것이 적발된 귄터 기욤 사건과 음주 섹스 스캔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하게 되고, 이미 사민당 수뇌부는 심각하게 이미지가 실추된 브란트로는 다음 선거에서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차기 총리로 슈미트를 내정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브란트가 사민당 내부의 사임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사퇴하자 브란트의 뒤를 이어 슈미트가 서독의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가 총리 자리에 취임했을 때 서독은 여러모로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68 혁명 이후 온건파와 분리된 강경 학생 운동 세력들이 적군파가 되어서 사회 주요 인사들에 대한 납치 및 암살과 테러를 자행하였고, 외부적으로는 석유파동으로 인해 물가와 실업률이 동시에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독일 경제를 강타했습니다. 게다가 귄터 기욤 사건이 발생하자 야당 기민당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매카시즘적인 공세를 사민당에게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당 위기 상황에서 총리 자리에 오른 슈미트는 좌우파 이념을 초월해 각각의 문제들을 각개격파해가는 방식으로 차근차근히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총리 취임 직후 수감 중인 테러리스트들의 석방을 조건으로 행해진 야당 정치인의 납치에 굴복한 이후, 독일 내부에서는 각종 납치와 테러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에 교훈을 얻은 슈미트 내각은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기본 기조로 내세우며 일괄적인 강경대응을 펼쳐나갑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바로 1977년 소말리아에서 테러리스트들이 루프트한자의 민항기를 납치하자 특공대를 파견해서 민간인 피해 없이 테러리스트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사건이 있습니다. 한편, 이 시기 가장 유명한 케인스주의 신봉자 중 하나였던 슈미트는 취임 초기 자신의 신념에 맞추어 적극적인 확장정책을 실시하여 실업률을 낮추려고 노력하는 한편으로 확장정책이 후일 그의 실각을 불러오는 재정적자를 심화시켰다는 건 아이러니한 결과입니다. 변동환율제 실시와 적극적인 수출 장려를 통해 물가상승에도 제동을 걸고자 하였습니다.
외교적으로도 능수능란함을 빛을 발휘해서, 1975년 그는 "거주지 변동의 자유, 의사소통의 자유, 인권 보장"을 내세우면서 소련으로 하여금 헬싱키 협약에 서명하게 했고, 이는 이후 1980년대 말 동구권의 붕괴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2차 대전 시절 장교 복무, 1970년대 초 국방장관을 역임했던 경험을 살려 국방 부문에서도 상당한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1972년 미·중 간의 교류로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자 서독은 동독과 군축협상에 들어갔는데, 1976년 베트남 통일을 시작으로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하면서 다시 냉전의 기운이 유럽을 덮고 있었고, 이때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일원인 동독에 핵탄두를 탑재한 SS-20 중거리 지대지 미사일을 배치합니다. 물론 소련이 실제로 서유럽에서 핵전쟁을 벌이기는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SS-20의 동독 배치가 당시에 가졌던 상징적 의미는 매우 컸습니다. 이는 유럽의 군사적 힘의 균형이 사회주의 공산권으로 쏠림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때쯤 갈수록 의석수를 늘리며 기염을 토해가고 있던 프랑스, 이태리의 공산당 세력, 서독 사민당 내의 좌파세력을 고무시키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극좌파들의 테러행위에 대한 성공적 진압과 국제 외교안보 분야에서 보여준 세계적 리더십 등을 바탕으로 슈미트는 1976년과 1980년의 총선에서 연이어 승리, 집권에 성공하였습니다. 특히 1976년 총선에서는 1975년에 서독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등 경제분야에서 최악의 성적을 보이고 있어서 기록적 참패가 예상되었으나, 절체절명의 TV 토론에서 특유의 냉철함과 명민함으로 상대를 압도하여 순전히 헬무트 슈미트의 개인기로 신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980년의 총선에서는 헬무트 슈미트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사민당의 지지율도 지극히 저조한 가운데 선거를 치렀지만, 1976~1979년의 독일 경제성장률이 괜찮았던 데다가 슈미트 총리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지지도가 높았던 데에 힘입어서 생각보다 편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총선 승리의 뒤에는 사민당의 의석수 감소와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의 의석수 증대에 따른 자민당과의 알력 심화라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연정은 1982년 마침내 파국으로 치닫고 맙니다. 제2차 석유위기와 그간의 확장재정정책으로 서독의 경제성장률이 하락하고 재정적자가 심해지자, 당시 사민당에 대거 진출했던 학생운동권 출신 의원들이 사민당 내 좌파그룹을 형성하며 노조와 연대하여 대대적인 부자증세, 사회간접자본투자 확대, 대기업 국유화 등 이른바 '체제극복적 개혁(systemüberwindende Reformen)'을 주장하는 등 슈미트 내각을 압박했던 것이죠. 게다가 사민당 의원 대다수는 퍼싱-2 미사일의 서독 배치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물론 슈미트 내각은 이러한 당내 반발에 계속 강경하게 맞섰지만, 당내 좌파그룹의 목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자 사민당-자민당 간의 연대는 점점 약화되었으며 자민당도 사민당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이 틈을 노려 기민련의 총재였던 헬무트 콜은 끊임없이 자민당에게 연립 정부 구성에 대한 러브콜을 날렸고, 자민당은 고민 끝에 사민당과의 연정 이탈 및 기민련-기사련과의 연정 구성에 합의함과 동시에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연방 하원 의회에 상정되면 찬성하기로 하고 연립정부 내의 자당 소속 각료들도 일단 물러나 당으로 돌아오게 하면서 사민당-자민당의 연정은 결국 붕괴되었습니다. 그리고 1982년 10월 1일 연방 하원 의회에 상정된 내각불신임결의안이 통과되면서 슈미트는 헬무트 콜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주고 물러납니다.

 


 

6대. 헬무트 콜 (Helmut Kohl) - 임기 1982~1998년 - CDU(기민련) 소속

[사진출처 :  http://iep-berlin.de/chronologie-deutscher-europapolitik/helmut-kohl-1982-1998/]

 

 

헬무트 콜은 서독 제6대 총리이자 통일 독일 초대 총리입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이후로 가장 오래 재임한 독일 총리이기도 하죠. 탁월한 국제정치감각을 바탕으로 냉전의 종식과 함께 다가온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분단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총리로, 이른바 '통일 재상(Kanzler der Einheit)'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콘라트 아데나워의 정치적 양자를 자처했던 만큼 그는 당연히 아데나워의 외교노선을 선호했고, 이는 그가 미국과 영국보다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위주의 외교정책을 선호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전임 헬무트 슈미트가 지스카르 데스탱과 평생에 걸쳐 우정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콜은 프랑수아 미테랑과 정치적으로 동반자 관계였죠. 특히나 1984년 베르됭에서 베르됭 전투의 전몰자들을 기리면서 미테랑과 콜이 오랫동안 손을 맞잡고 있던 모습은 단순히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만이 아니라 유럽 연합의 초석을 닦은 장면으로까지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데나워의 외교노선만을 따랐던 것은 아니어서 1987년에는 동독의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정상회담을 갖으며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을 계승하려는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이 시기 콜은 두고두고 논란이 되는 발언을 하는데 바로 늦게 태어난 자의 은혜(Gnade der späten Geburt)가 그것입니다. 짧게 설명하자면 자신과 자신보다 어린 세대들이 반유대주의와 나치에 대해 비판적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시대가 끝날 무렵에 태어나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았기 덕분이라는 요지의 이 발언입니다. 당연히 제3제국 시기 적극적인 반나치 활동을 펼쳤던 사람들에게 미친 듯이 비판을 받았으며, 서독 내부에서 총리가 올바른 역사적 인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불을 뿜었었습니다. 어쨌든 콜은 무난무난하게 1983년의 선거와 1987년의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3선 총리가 됐지만 5년 뒤 빌 클린턴의 선거문구가 보여주었듯이 대중들은 화려한 외교적 행보보다는 자신들의 지갑에 더 관심이 있는 법이었고, 대중적으로나 당내에서나 콜의 인기는 점점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합니다. 자매정당인 기사연과 연정 파트너 자민당도 콜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989년에는 당 내의 반대파들이 콜 대신에 새로운 인물을 총리 후보로 내세우려는 움직임까지 있었습니다. 이 시기 콜이 무력하게 당 내 헤게모니 싸움에서 패배했다면 그는 그저 그런 총리로 역사 속에 남았겠지만, 독일의 재통일(Wiedervereinigung)이라는 독일의 거대한 역사적인 태풍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990년 3월에 동독에서 자유선거가 치러지게 되었습니다. 선거운동 기간 중에는 예상외로 독일 사회민주당이 압승을 거둘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점진적인 통일을 주장한 사민당에 비해 조속한 통일과 화폐통합을 내세운 콜의 공약이 결국엔 판세를 뒤엎어버리는데 성공, 기민당과 자민당이 압승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통일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왔고 그 영향으로 5월에 치러진 동독 지방선거에서는 기민당이 부진했었지만, 콜 총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동서독 1:1 마르크 교환정책을 펼치면서 동독 지역주민들의 재산을 보전시킴과 동시에 외교적으로도 강대한 독일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영국과 프랑스 등은 물론이고,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은 소련과 폴란드를 구 영토에 대한 영유권 완전 포기 선언으로 설득에 성공하면서 통일에 장애물들을 차근차근 정리해나가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10월 3일에 동독과 서독은 다시 하나의 국가가 됩니다. 그리고 2개월 뒤 통일 후 첫 총선에서 기민당은 과반수를 훌쩍 넘는 압승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급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한 만큼 후유증도 만만치 않아서 콜 총리는 빠른 속도로 동독과 서독 양 측에서 인기를 잃어나가기 시작합니다. 동독인들은 동독인대로 통일이 되면 잘살게 될 것이라는 환상이 처절하게 깨지며 분노했고, 서독인들은 서독인대로 통일에 대한 혜택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 채 세금만 올라가면서 불만에 가득 찬 상황이 되며 동서 간의 심리적 거리는 통일 전보다도 훨씬 벌어졌고 헬무트 콜의 지지율도 급속히 하향세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1994년 총선에서 간신히 4선에는 간신히 성공했지만 사민당이 연방상원에서 다수를 차지하면서 콜의 정치적 운신에는 엄청난 제약이 걸리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패기로 5선에 도전한 1998년 총선에서 결국 콜은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끄는 독일 사회민주당에게 참패, 1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끝에 총리직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7대. 게르하르트 슈뢰더 (Gerhard Schröder) - 임기 1998~2005년 - SPD(사민당) 소속

[사진출처 :  https://www.sueddeutsche.de/politik/russland-nord-stream-2-gerhard-schroeder-bundestag-1.4952474]

 

 

슈뢰더는 1998년 총선에서 '새로운 중도노선', '좌파 속의 우파' 등을 외치며 16년 넘게 장기 집권하던 헬무트 콜 총리를 꺾고 총리가 되었습니다. 1990년 공산주의가 몰락한 이래 서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침체기를 맞았으나, 90년대 후반 우파적인 요소를 대거 수용하여 우파와 좌파를 절충하는 이른바 '제3의 길'을 표방하며 유럽 정치계에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물결 속에서 1997년 영국의 토니 블레어와 프랑스의 리오넬 조스팽이 총리가 되었으며 뒤이어 슈뢰더가 집권에 성공하며 유럽 중도노선의 지도자로 각광을 받게 됩니다. 실제로 그는 총리 당선 이후인 1999년 6월 8일 토니 블레어와 함께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위해 전진하는 제3의 길>이라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으며, 제3의 길 노선과 같은 맥락인 '신중도' 노선을 지향했습니다. 총리에 당선되자 외국의 이민자들에게도 독일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또한 통일의 여파로 폭등한 독일의 실업률을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외교적으로는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힘썼죠. 2002년 총선에서는 지지율이 썩 좋지 않았지만 엘베강 홍수재난에 맞서 보여준 리더십에 힘입어 가까스로 과반 의석을 확보, 재선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 후 경제가 악화된 것으로 인해 야당의 비난을 받게 되자 난국을 타파하기 위해 2005년 의도적으로 셀프 불신임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기 총선을 통해 총선에서 승리하여 입지를 굳히려고 했죠. 목표는 이렇지만 사실 총선이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지지율이 밀리고 레임덕이 일어나자 더 손해 볼 것도 없으니 될 데로 돼라 한 것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선거 운동 기간 중에 기민당의 압승이 예상되었다가 선거 막판 기업 감세, 소비자 증세 논란 + 토론회에서 슈뢰더의 대승이 합쳐져 기민당의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고 그 반사이익으로 사민당의 지지율이 크게 올랐지만 결국 역전에는 실패해서 기민/기사련이 1당이 되었습니다. 기민/기사련과 자유민주당 연합은 물론이고 사민당도 연정 파트너인 녹색당과 합해도 과반을 못 넘는 것은 마찬가지라서 참으로 애매한 결과가 나왔다고 평가되었습니다. 사실 제일 좌파적이었던 좌파당까지 연정에 포함시키면 과반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전직 사민당 당수였던 현 좌파당 당수 오스카 라퐁텐과 슈뢰더와의 사이가 최악이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연정 협상에 나선 슈뢰더는 처음에 총리직을 내주지 않고 버티려 하였지만, 제1당이 된 기민당이 결국 연정 협상을 주도하면서 사민당이 참여하는 대연정을 구성하기로 합의하게 되었고, 슈뢰더는 앙겔라 메르켈에게 총리직을 넘겨주고 퇴임합니다.
슈뢰더는 한국과도 인연이 꽤나 많은데요, 9월에는 자서전 한국 출판 기념으로 한국에 방문하여, EBS 초대석에 출연하여 자신의 정치 역사를 이야기하였으며, 나눔의 집에 가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났고,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5.18 취재를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를 관람하였으며, 문재인 대통령과 접견 자리를 가졌습니다. 또한 2018년 슈뢰더는 베를린에서 김소연 씨와 결혼하면서 결혼 후에는 독일과 한국을 오가고 여생의 절반을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어도 배울 것이라고 밝혔다. 

 


 

8대. 앙겔라 메르켈 (Angela Dorothea Merkel) - 임기 2005년~ 현재 - CDU(기민련) 소속

[사진출처 :  https://www.zimbio.com/photos/Angela+Merkel/German+Chancellor+Angela+Dorothea+Merkel+Visits/fa5Sf9E4irW]

 

 

앙겔라 메르켈은 독일의 정치인. 현재 하원 의원이자 현 독일의 연방총리입니다. 2005년 11월 22일부터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로 15년 가까이 재임하고 있습니다. 독일 기민당(기독교 민주연합) 소속으로서, 현재까지 연립 정부(좌, 우 대연정)를 이끄는 총리이며, 4년 연속 포브스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이기도 하였으며 2015년에는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진 독일 여성청소년부 장관을, 94년부터 1998년까진 환경, 자연보호, 원자력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2000년 4월 10일부터 기민당 최초로 여성 의장을 지냈고 2005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의석수를 줄였지만 기민당도 의석수가 줄어들었죠. 당초 기민당의 압승이 예상되었지만, 토론회에서 사민당 소속 현직 총리였던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메르켈에게 토론회에서 판정승을 거둔 데다가, 선거 막판 부가가치세를 인상하면서도 정작 기업에 대한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공약이 논란이 되어 중산층 이하 시민들의 지지율을 깎아먹었게 됩니다. 결국 원내 제2당인 사민당과 내각 구성을 협력하는 좌우 대연정을 구성하여 2005년 11월 22일부터 독일의 제8대 총리를 지내고 있습니다. 취임 초기엔 독일 사회에서 꽤 신기하게 여겼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풍채가 좋거나 남성적인 매력이 있는 정치인을 좋아하는 독일 정서에서는 대단히 신기한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2009년 총선에서 자민당의 약진과 사민당의 대참패에 따라 우파 진영이 더 많은 의석을 확보하면서 사민당을 뺀 새로운 연정을 구성, 계속 총리로 재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민당 총리 후보로 나와 메르켈과 겨룬 이가 현 독일 대통령인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입니다. 2013년 총선에서 메르켈 총리의 기민당(CDU)-기사당(CSU)이 사민당과의 '대연정 구성'에 성공, 메르켈 총리의 3 연임이 확정되었습니다. 만약 4년 임기를 채울 경우 11년 7개월간 집권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제치고 유럽 최장수 여성 총리가 되는 것이었죠. 2014년 12월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승리하며 총리로써 4선의 고지에 올랐습니다. 이때 이례적으로 사회민주당을 상대로 디스를 했는데, 이는 11월의 튀링겐 주에서 기민당이 튀링겐 주 선거에서 승리했음에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좌파당-사회민주당-녹색당이 적적록대연정으로 기민당을 물 먹인 것에 대한 반응으로 보입니다. 메르켈 총리는 튀링겐 주에 좌파당이 집권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주 총리를 줘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반발하기도 하였습니다. 2017년 총선이 다시 치러졌고, 자유민주당(FDP)이 의회에 복귀함과 동시에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제3당으로 의회에 처음으로 진출하였습니다. 숱한 어려움 끝에 사회민주당과 다시 흑적 연정을 설립했으며, 이젠 적적록대연정이 이뤄진다고 해서 정권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선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메르켈이 독일 총리로써 임기를 시작한 2005년부터 2010년까지는 2008년 세계경제위기를 제외하고 그다지 크나큰 위기가 없어 독일과 유럽 정치를 운영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2011년 아랍의 봄을 기점으로 유럽 주변에 크림 위기, 브렉시트 등 대형 악재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이에 대처해야 하는 사실상 유럽 연합의 지도자로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또한 난민 문제와 터키와의 관계 및 내부와의 마찰 등의 문제가 터지면서 메르켈의 입지를 흔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2017년 4선에 성공하고 2018년 제4차 메르켈 내각이 출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2018년 10월 열린 헤센 주 지방선거가 끝난 직후, 메르켈 총리는 동년 12월에 열리는 기독 민주연합 대표 전당대회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다만 총리직은 2021년 총선 전까지 유지한다고 합니다. 메르켈은 그간 총리직과 기민련 대표직을 겸직하는 걸 중요하게 여겨왔기 때문에 기민련 전당대회 불출마 선언은 파격적이란 평가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아직까지 후계자를 따로 키워오지 않았던 터라 더 의외였죠. 메르켈이 이런 결단을 내린 이유는 연정이 불안정한 데다가 최근 치러진 바이에른주 의회 선거에서 자매정당인 기사련이 득표율 하락으로 2007년을 제외하고 매번 차지하던 단독 과반에 미달하고, 헤센 주 의회 선거에서도 기민련의 득표율이 10% 넘게 떨어진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1. 독일의 연방총리와 연방대통령의 권한과 직무. 그 차이점에 대하여.

https://herr-kwak.tistory.com/124

 

2. 독일의 역대 대통령

https://herr-kwak.tistory.com/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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