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r.Kwak_일상/독일에서 이모저모

독일의 역대 대통령 (독일연방공화국 한정)

o헤어곽o 2020. 8. 2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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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www.tagesspiegel.de/politik/frank-walter-steinmeier-der-praesident/19537968.html]

 

현재 독일은 독일 연방 공화국이라는 정확한 명칭을 가지고 있으며,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4명의 대통령이 있었으며, 이후 플렌스부르크 정부 되니츠 내각 당시 3대 대통령인 아돌프 히틀러를 포함하여 4명의 대통령이, 그리고 동독(독일 민주공화국)에는 대통령으로 시작하여 국가평의회 의장, 인민의회 의장으로 호칭이 변경되었지만 총 7명의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독일, 독일연방공화국은 1대 테오도어 호이스에서부터 현재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12대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12명의 대통령과 2명의 권한대행이 있었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지난 포스팅(하단에 링크 있음)에 부속 편 느낌으로 독일의 대통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이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대. 테오도어 호이스 (Theodor Heuss) - 임기 1949~1959년 - FDP(자민당) 소속 - 416/804 득표 - 득표율 51.7% (2차 임기 871/1018 득표 - 득표율 85.6%)

[사진출처 : https://www.badische-zeitung.de/warum-theodor-heuss-fast-80-gesetze-in-loerrach-unterschrieben-hat--177182598.html]

 

서독의 초대 대통령으로, 콘라트 아데나워와 함께 전후 독일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에 크게 기여한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제왕적 대통령직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파멸을 불러왔던 만큼 호이스는 신생 서독에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뿌리내리는 것을 돕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까지 대통령에게 쓰이던 '각하'라는 권위적인 호칭 대신에 '호이스 씨(Herr Heuss)'라는 호칭을 사용했으며, 실질적 국가원수인 총리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국무회의에는 재임기간 내내 단 한 번도 참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대. 하인리히 뤼프케 (Karl Heinrich Lübke) - 임기 1959~1969년 - CDU(기민련) 소속 - 526/1038 득표 - 득표율 50.7% (2차 임기 710/1042 득표 - 득표율 68.1%)

[사진출처 : https://www.bundespraesident.de/DE/Die-Bundespraesidenten/Heinrich-Luebke/heinrich-luebke-node.html]

 

테오도어 호이스의 뒤를 이어 서독의 2대 대통령이 된 그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중앙당을 계승한 기민당에 가입하였으며 고향이었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농업장관을 담당하다가 콘라트 아데나워에 의해 중앙 정계까지 발탁되어 연방 정부 차원의 농업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다지 정치적이지 않았던 그의 성향에 주목한 콘라트 아데나워는 1959년 테오도어 호이스의 후임 대통령을 결정할 선거의 기민당 측 후보로 뤼프케를 지명하였으며, 의회에서 기민당이 다수를 점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뤼프케는 어렵지 않게 대통령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독일의 대통령직은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실권은 그의 임기 중 총리였던 콘라트 아데나워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쿠르트 키징어에게 있어서 별다른 눈에 띄는 행적은 없었지만 1969년 임기 만료를 3개월 앞두고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임하게 됩니다.

 


 

3대. 구스타프 하이네만 (Gustav Walter Heinemann) - 임기 1969~1974년 - SPD(사민당) 소속 - 512/1036 득표 - 득표율 49.4%

[사진출처 : https://www.bundespraesident.de/DE/Die-Bundespraesidenten/Gustav-Heinemann/gustav-heinemann-node.html]

 

서독의 3대 연방 대통령을 지냈으며 그 외에도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등의 정부 요직을 거쳤습니다.

2차대전 후에는 에센 시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기민당 창당에도 관여합니다. 이후 내무부 장관으로 입각하지만, 당내에서 독일군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에 반발하여 내무부 장관직에서 사임하면서 기민당에서 탈당하여 이후 1957년에 사민당에 입당합니다.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그가 사민당에 가입한 것은 상당한 파장을 독일 정계에서 불러일으켰으며, 오늘날 하이네만의 사민당 입당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한 사민당의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 정당에서 대중 정당으로의 전환의 시발점이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후 1966년 법무부 장관으로 입각합니다. 이어 1969년 당시 서독의 대통령이었던 하인리히 뤼프케가 사임하자, 그의 후임자를 결정할 투표에서 사민당의 후보로 출마하였고 여기서 당선되면서 서독의 3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됩니다. 하이네만의 당선에는 자민당의 지지가 결정적이었고, 여기서부터 싹 튼 사민당과 자민당의 우호관계는 같은 해 10월 정권 창출을 둘러싼 협상과정에서 자민당이 오랜 기민당과의 연정 관계를 청산하고 사민당과 연정 관계를 이루면서 꽃을 피우게 됩니다. 총리로 취임한 빌리 브란트는 동방 정책을 기치로 내걸면서 동구권 국가들과의 외교관계를 활발히 했고, 이에 발맞추어 하이네만 역시 동구권 국가들을 활발히 방문하면서 2차 대전 시기 독일이 저지른 각종 전쟁범죄들을 사죄합니다. 하이네만의 이런 행보는 당시 학생과 지식인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고, 1974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재선 역시 어렵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이미 70대 중반이었던 하이네만은 자신의 나이와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합니다.

 


 

4대. 발터 셸 (Walter Scheel) - 임기 1974~1979년 - FDP(자민당) 소속 - 530/1036 득표 - 득표율 51.2%

[사진출처 : https://www.bundespraesident.de/DE/Die-Bundespraesidenten/Walter-Scheel/walter-scheel-node.html]

 

독일의 제4대 대통령 발터 셸은 독일 연방 경제 협력 개발 기구의 장관, 외무장관 겸 부수상, 수상 권한대행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1969년 자신의 당을 사회민주당과 새로운 합동을 이루는 데 공헌을 했던 그는 빌리 브란트 수상 아래에서 외무장관 겸 부수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지도 아래, 서독은 소비에트 연방과의 화해 조정을 설득하고 정식으로 동독의 현존을 인정하였습니다. 이 정책은 자유/사회 민주당 양당원들이 야당으로 편을 바꾸는 여러 방향과 함께 대규모의 공개 토론이 일어나는 원인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1974년 5월 7일 브란트 수상이 자신의 측근 귄터 기욤의 간첩 혐의 사건으로 사임하자, 셸은 5월 16일까지 수상의 직무 대행을 맡았고, 때마침에 셸은 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습니다.

 


 

5대. 카를 카르스텐스 (Karl Carstens) - 임기 1974~1979년 - CDU(기민련) 소속 - 임기 1974~1979년 - 528/1036 득표 - 득표율 51.2%

[사진출처 : https://www.gettyimages.ie/photos/karl-carstens-carstens?family=editorial&phrase=karl%20carstens%20carstens&sort=mostpopular]

 

1960년 외무부의 서기로 정치생활을 시작한 카르스텐스는 1972년에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경력을 쌓기 시작하여, 기독교 민주연합/기독교 사회연합 의회 단체의 의장을 지내면서, 독일 사회에서 좌익 경향의 비평에 솔직한 말을 하였고 기독교 사회연합의 좌익 과격주의자들에 대한 너무 연한 정책을 고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갑니다. 그는 또한 작가 하인리히 뵐을 좌익 테러의 후원자로서 비난하기로 유명하였죠. 이후 1979년 독일 연방 공화국의 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재임 기간 동안에 정치와 국민 사이의 격차를 줄이는 명령에서 독일을 인상하기로 잘 알려졌습니다. 1983년 1월 7일 카르스텐스는 하원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새 선거를 실시하였습니다. 2월에 카르스텐스의 결정은 연방 헌법 재판소에 의하여 찬성되어 선거를 실시할 수 있게 되었지만, 1984년 자신의 나이에 재선을 향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6월 30일에 사임하였습니다.

 


 

6대.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 임기 1984~1994년 - CDU(기민련) 소속 - 832/1040 득표 - 득표율 80.0% (2차 임기 881/1038 득표 - 득표율 84.9%)

[사진출처 : https://www.bundespraesident.de/DE/Die-Bundespraesidenten/Richard-von-Weizsaecker/richard-von-weizsaecker-node.html]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는 독일의 제8~9대 대통령입니다. 그는 서베를린의 시장을 지내기도 하였고, 1984년에서 1994년까지 독일 연방대통령을 지낸 그는, 해당 서독 대통령 재임 시절이던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을 이룩하였습니다.  바이츠제커는 정치적, 국가적, 세대적인 한계에 도달하기 위해 여러 논쟁점들을 강연하여 전통적으로 독일 대통령의 의식적 자세를 넓혔습니다. 그의 대중적 강연과 필적에서 바이츠제커는 민주적 원리, 관용, 사회적 책임의 강력하고 또렷한 주창자로 지내왔으며, 그는 지구촌 기아 구조에 목표를 둔 식량 원조에 관련된 활동을 해왔습니다. 이제 자신이 연장 정치인이지만, 바이츠제커는 아직도 정치와 자선적 정세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는 의회를 개혁하기 위해 당시 사민당-녹색당 연합 정부가 설립한 위원회의 의장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국제적 위원회에서 근무를 하였는데, 국제 연합의 미래 독립 근로자 그룹의 회장을 지냈고 유럽 연합의 미래를 숙고하기 위해 로마노 프로디 위원장이 꼽은 3명의 지혜로운 사람들 중의 하나로 꼽혔습니다.

 


 

7대. 로만 헤어초크 (Roman Herzog) - 임기 1994~1999년 - CDU(기민련) 소속 - 696/1324 득표 - 득표율 52.6%

[사진출처 : https://www.bundespraesident.de/DE/Die-Bundespraesidenten/Roman-Herzog/roman-herzog-node.html]

 

로만 헤어초크는 독일의 제11대 대통령으로, 1990년 독일 통일 후, 처음으로 선출된 대통령입니다. 1973년 본의 연방 정부와 함께 라인란트팔츠주의 대표로서 정계에 입문한 그는, 1978년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문화, 체육상을 지냈다가, 1980년 주 의회에 뽑혀 내무장관을 지냈습니다. 1983년 카를스루에에서 독일 연방 헌법 재판소의 판사가 되었고, 1987년부터 1994년까지 재판소의 소장을 지냈습니다. 이후 1994년 연방 회의에서 열린 선거에서 독일의 7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99년까지 재임하였습니다. 대통령에 선출된 후, 바르샤바 봉기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폴란드 투사들과 국민들에게 찬사를 바쳤습니다. 1999년 12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유럽연합의 기본권 헌장을 도안한 유럽 집회의 회장으로 있었습니다.

 


 

8대. 요하네스 라우 - 임기 1999~2004년 - SPD(사민당) 소속 - 690/1333 득표 - 득표율 51.7%

[사진출처 : https://www.vorwaerts.de/artikel/johannes-rau-patriot-ohne-nationalist]

 

요하네스 라우는 1978년부터 1988년까지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주 수상을, 1999년부터 2004년까지는 독일 연방 공화국의 제8대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1977년 라우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사민당 의장이 되었고, 1978년부터 1998년까지 주의회 회장을 지냈다. 1987년에는 사민당 소속의 총리가 되려고 하였으나, 녹색당과의 연합 내각을 이루는 데 거절하여 선거에서 패하였고, 1994년에는 7대 연방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로만 헤어초크에게 패하였습니다. 이후, 1998년 사민당 의장과 주의회 회장에서 물러나면서, 1999년 5월 23일 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2004년 6월 30일까지 재임하였습니다. 재임기간 중, 2000년 홀로코스트 이래 독일 국가원수 처음으로 이스라엘 국회에서 연설을 하였습니다. 이 논쟁적 단계는 어떤 이스라엘 사절단들을 항의 퇴장을 하도록 자극하였습니다. 하지만, 모셰 카차브 이스라엘 대통령은 두 국가 사이의 공간에 다리를 세운 공헌에 그를 후원하고 칭찬하였습니다.

 


 

 

9대. 호르스트 쾰러 - 임기 2004~2010년 - CDU(기민련) 소속 - 604/1204 득표 - 득표율 50.1% (2차 임기 613/1242 득표 - 득표율 50.1%)

[사진출처 : https://www.horstkoehler.de/africa/bundespraesident-a-d-horst-koehler-in-berlin-20/]

 

호르스트 쾰러는 독일의 제9대 대통령에 재임했으나 2010년 5월 31일 중도 사임했습니다. 그 전에는 2000년부터 2004년 3월까지 국제 통화 기금의 총재였으며, 독일 기독민주연합의 당원이었습니다. 이후 앞서 말했다시피 2004년 5월 열린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과반수를 얻은 쾰러가 제9대 독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쾰러는 이전의 이력에 정치 경력이 없는 첫 독일 대통령이며, 또 현 독일 영토 밖에서 출생한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2005년 2월에는 이스라엘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전임 대통령 요하네스 라우에 이어 두 번째로 이스라엘 국회에서 연설한 대통령이 되었죠. 그 해 7월 연방 의회 선거를 일 년 앞당겨 실시하고 싶다 밝힌 게르하르트 슈뢰더 수상의 제안으로 수상 불신임안이 가결되어 대통령의 권한으로 연방 의회에 해산을 명하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선거의 결과로 슈뢰더 정권이 물러나고, 앙겔라 메르켈 정권이 성립되었습니다. 독일 현지에서는 기민당과 기사당 내에서 그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며 2009년 5월 23일에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 되었습니다. 이후 2010년 5월 22일, 아프가니스탄 방문 도중 독일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작전이 필요하다는 식의 인터뷰를 하여 '포함(砲艦) 외교' 논란을 야기했으며, 이로 인해 5월 31일에 대통령직에서 자진 사임하였습니다.

 


 

10대. 크리스티안 불프 (Christian Wulff) - 임기 2010~2012년 - CDU(기민련) 소속 - 625/1242 득표 - 득표율 50.3%

[사진출처 : https://www.bundespraesident.de/DE/Die-Bundespraesidenten/Christian-Wulff/Christian-Wulff-node.html]

 

2010년 6월 30일 대통령 보궐선거에서 요아힘 가우크와 대결 끝에 제 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당일로 취임하였습니다. 하지만 2011년 말부터 니더작센 주지사 시절 2008년 주택 구입을 위해 사업가인 지인으로부터 시중금리보다 현저히 낮은 4% 조건으로 50만 유로의 부도덕한 사채를 쓴 의혹과, 같은 해 가을에 아내와 함께 옥토버페스트를 보려고 뮌헨에 갔을 때 영화제작사 대표인 데이비드 그뢰네볼트로부터 720 유로(한화 105만원)의 호텔 숙박비를 지원받은 정황 및 불프가 이후 엔지니어링 기업인 지멘스로 하여금 그뢰네볼트의 영화 제작을 지원하도록 로비를 정황이 부정 청탁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결국 2012년 2월 17일 사임했는데 전날 하노버 지방검찰청이 면책특권 폐지 신청을 연방하원에 요청한 것이 타격이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11대. 요아힘 가우크 (Joachim Gauck) - 임기 2012~2017년 - 무소속 - 991/1228 득표 - 득표율 80.7%

[사진출처 : https://www.joachim-gauck.de/gesellschaft-im-wandel/2019/buchneuerscheinung/]

 

동독 출신 독일의 인권운동가이자 독일 연방 공화국의 제11대 대통령입니다.
1989년 동독 정권을 뒤흔든 시민들의 시위 와중에 동독 내 지식인들은 노이에스 포룸(Neues Forum)이라는 시민단체를 창설하고 가우크도 여기에 참여합니다. 이후 독일 총리 헬무트 콜에 의하여 가우크는 구 동독 문서관리청장에 임명되고, 슈타지의 기밀문서 및 이에 관련된 반 인권 범죄를 조사하는 일을 담당하면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문서관리청장에서 물러난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2010년에는 퀼러 대통령이 사임하자 사민당과 녹색당 연합의 후보로 대통령 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지지하는 기민당의 크리스치안 불프에게 밀려 낙선하게 됩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2000년대 초중반에 기민당 쪽에서도 가우크를 대통령 후보로 영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가우크 본인이 고사해서 무산되었다고 하네요. 심지어 2010년 선거 와중에도 구 동독 지역에서 활동하는 기민당 정치인들 중 몇 명은 '당도 당이지만 솔직히 가우크가 더 나은 인물임'이라면서 가우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불프가 2012년에 비리로 구설수에 올라 임기 중 사임하게 되자 보궐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등록해 당선됩니다. 이때 가우크는 기민당, 사민당, 자민당, 녹색당 모두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정확히는 총 선거인 1232명 중 108명의 기권을 제외하고 991표(80.4 %)를 얻었습니다. 말 그대로 좌우합작이네 심지어 반공 성향의 가우크를 껄끄럽게 여기는 좌파당 지지자 중에서도 절반 가까이는 가우크를 지지한 것이죠. 이러한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가우크는 무난히 대통령직을 수행했습니다. 매우 높은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기의 종료 이후 연임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고 물러났습니다.

 


 

12대.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Frank-Walter Steinmeier) - 임기 2017년~현재 - SPD(사민당) 소속 - 931/1260 득표 - 득표율 73.9%

[사진출처 : https://www.cicero.de/innenpolitik/bundespraesident-steinmeier-jamaika-sondierungen-abbruch]

 

사회민주당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의 비서실장, 외무부 장관, 사회민주당의 총리 후보까지 경험한 정치인입니다. 2009년 총선에는 사민당의 후보로 메르켈의 대항마로 나선 적도 있으며 2005년과 2013년 두 번의 대연정 내각에 참여하여 부총리 겸 외무 장관 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제3의 길을 추구한 슈뢰더 총리의 방향성을 잇는 실용주의적인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역대 독일의 연방대통령 편과 관련된 포스팅 리스트입니다.

 

1. 독일의 연방총리와 연방대통령의 권한과 직무. 그 차이점에 대하여.

https://herr-kwak.tistory.com/124

 

2. 독일의 연방총리(연방수상)

https://herr-kwak.tistory.com/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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