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r.Kwak_관심사전/독일에서 축구구경

독일 축구클럽 - 헤르타 BSC (Hertha BSC)의 모든것.

o헤어곽o 2020. 10. 7.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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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wallpapercave.com/hertha-bsc-wallpapers]

 

기본 정보 

 

 - 정식 명칭 : Hertha, Berliner Sport-Club e.V

 - 애칭 : Die alte Dame (노파)

 - 창단일 : 1892년 07월 25일

 - 연고지 : 독일 베를린주 (Berlin)

 - 홈구장 : 올림피아 슈타디온 베를린 (Olympiastadion Berlin)

 - 슬로건 : Die Zukunft gehört Berlin (미래는 베를린의 것이다)

 - 회장 : 베르너 게겐바워 (Werner Gegenbauer)

 - 이사회 : 토르스텐외른 클라인 (Torsten-Jörn Klein), 베른트 시프호르스트 (Bernd Schiphorst), 클라우스 브뤼게만 (Klaus Brüggemann), 옌스 레만 (Jens Lehmann), 스캇 쾨르버 (Scott Körber)

 - 대주주 : 라르스 빈트호르스트 (Lars Windhorst)

 - 단장 : 미하엘 프레츠 (Michael Preetz), 아르네 프리드리히 (Arne Friedrich)

 - 감독 : 브루노 라바디아 (Bruno Labbadia)

 - 주장 : 데드릭 보야타 (Dedryck Boyata)

 

[좌측부터 브루노 라바디아 감독, 주장 데드릭 보야타 선수]

 

 - 2020/2021 시즌 유니폼

 

[사진출처 : https://namu.wiki/w/%ED%97%A4%EB%A5%B4%ED%83%80%20BSC]

 

[사진출처 : https://www.herthabsc.de/en/teams/our-new-jersey-2020/21/page/1436--4-4-.html]

 

 - 우승 기록

  → 독일 챔피언십 2회

  → 브란덴부르크 독일 챔피언십 12회

  → 가우리가 베를린-브란덴부르크 (1부) 2회

  → 오버리가 베를린 (1부) 3회

  → 2. 분데스리가 (2부) 9회

  → 3. 리가 (3부) 3회

  → DFB-리가포칼컵 2회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연고로 한 스포츠 클럽으로, 축구뿐만 아니라 풋살, 여자축구, 비치발리볼 팀까지 있는 지역 스포츠 클럽입니다. 팀의 공식 명칭은 헤르타 베를린 스포츠 클럽입니다. 그래서 약칭으로 헤르타라고 하며, 또는 헤르타 베를린, 스포츠 클럽까지 줄여서 헤르타 BSC로 표기합니다. 헤르타는 독일 신화에서 풍요의 여신인 네르수스의 별칭이라고 하죠. 수도 베를린의 많은 클럽 중에서 제일 강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베를린에서 제일 인기도 많은 편인데, 이 팀의 역사는 진짜 파란만장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이탈리아의 AS 로마와 SS 라치오, 잉글랜드의 첼시 FC나 아스날 FC 및 토트넘 핫스퍼 FC를 비롯한 런던 팀들, 프랑스의 파리 생제르맹 FC 등 수도를 연고지로 둔 다른 클럽의 위상, 전력과 비교하면 유독 초라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분데스리가보다 한 단계 아래 리그의 수도권 팀인 SL 벤피카, AFC 아약스, 디나모 키예프 같은 팀들보다도 위상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죠. 1936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인 베를린 올림피아 슈타디온을 그대로 홈구장으로 쓰고 있어서 7만 명이 넘는 관중석 규모는 장난이 아닙니다. 분데스리가에서도 헤르타 베를린보다 더 많은 관중석을 가진 구단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하나뿐입니다. (BVB 홈구장 시그널 이두나 파크 81,365석)

 


1군 스쿼드

[사진출처 : https://www.weltfussball.de/teams/hertha-bsc/2021/2/]

 

 - 2020년 현재 1군 스쿼드 (2020년 09월 30일 기준)

 

GK(골키퍼) : 알렉산더 슈볼로(1), 닐스 쾨르버(12), 루네 야르슈타인(22), 플로리안 팔모프스키(38)

DF(수비수) : 페테르 페카리크(2), 카림 레킥(4), 니클라스 슈타르크(5), 루카스 클륀터(13), 막시밀리안 미텔슈테트(17), 데드릭 보야타(20), 마르빈 플라텐하르트(21), 요르단 토루나리가(25), 마르톤 다르더이(31), 루카 네츠(32), 플로리안 바크(37), 데요바이시오 제이파위크(42)

MF(미드필더) : 블라디미르 다리다(6), 마테오 귀앵두지(8), 온드레이 두다(10), 매튜 레키(11), 자바이로 딜로순(16), 산티아고 아스카시바르(18), 뤼카 투자르(29), 율리안 알브레히트(39)

FW(공격수) : 크시슈토프 피옹테크(7), 마테우스 쿠냐(9), 존 코르도바(15), 펄코 다르더이(24), 제식 은간캄(27), 도디 루케바키오(28), 다이션 레단(33), 모리스 초비치(34), 오마르 레킥(35), 무하메드 키프리트(36)

 


 

[사진출처 : https://www.herthabsc.de/de/hertha/vereinsgeschichte/1892-1963/page/391-500-4--.html]

 

클럽은 1892년, 청색과 백색의 굴뚝을 가진 증기선의 이름을 딴 BFC 헤르타 92 (BFC Hertha 92)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었습니다. 클럽을 창단한 젊은이 4명 중 1명은 그의 아버지를 따라 이 증기선으로 여행을 하였죠. 헤르타란 이름은 게르만 신화의 풍요 여신인 네르투스의 다른 이름입니다.
헤르타는 1905년 첫 베를린 선수권을 우승하는 것을 포함하여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1910년 5월, 헤르타는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와의 친선경기에서 승리하였는데, 이는 당시 축구의 기원이자 축구를 지배하던 잉글랜드 클럽을 상대로 거둔 승리였기에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재정적으로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는데, 1920년에 충실한 노동 계층의 지지와 베를리너 슈포어트-클루브 (Berliner Sport-Club)가 합쳐져 헤르타 베를리너 슈포어트-클루브 (Hertha Berliner Sport-Club)이 되었습니다. 새로 통합된 구단은 오버리가 베를린-브란덴부르크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으나, 큰 굴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팀은 1926년부터 1931녀까지 6 시즌 연속으로 독일 챔피언쉽 결승전에 진출하였으나, 이 중 1930년과 1931년에 단 두 번 만을 우승하였고, BSC는 첫 챔피언쉽 우승 후 독립하였습니다. 그에도 불구하고 헤르타 (Hertha)는 제1, 2차 세계대전 전쟁 사이 기간 동안 독일의 두 번째로 성공적인 구단이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www.bz-berlin.de/artikel-archiv/die-geschichte-von-hertha-bsc-teil-5]

 

독일 축구는 1933년 제3제국이 출범하면서 16기의 1부 리그로 나뉘게 되었고, 헤르타 (Hertha)는 이 시기에 가울리가 베를린-브란덴부르크에 소속되었습니다. 클럽은 소속된 리그에서 계속해서 성공을 거두었고, 대개 리그를 상위권으로 마무리하였으며, 1935년, 1937년, 그리고 1944년에는 우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패권을 서서히 잃은 헤르타는 국가 챔피언쉽의 하위 라운드에도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이 클럽은 히틀러의 주시 하에 놓였는데, 당시 나치당 일원이었던 한스 파이퍼 (Hans Pfeifer)가 클럽 회장을 부임하였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www.tagesspiegel.de/berlin/hertha-bsc-berlin-nach-dem-zweiten-weltkrieg-nach-dem-kriegsende-kam-das-aus-fuer-den-fussball/11787774-2.html]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을 점령한 연합군 관계자들은 스포츠 및 축구 클럽들을 포함하여 독일의 대부분의 조직 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1945년, 헤르타는 1945년에 SG 게준트브루넨 (SG Gesundbrunnen)으로 재조직되었고, 오버리가 베를린 C조에서 활동을 재개하였습니다. 종전 후 오버리가 베를린의 첫 시즌에 소속된 팀의 숫자는 36개에서 이듬해에 12개로 줄어들었고, 클럽은 축구 1부 리그에서 제외되어 아마토이어리가 베를린으로 옮겼습니다. 1949년 말, 팀은 본명인 헤르타 BSC 베를린 (Hertha BSC Berlin)으로 환원되었고, 1부 리그로 복귀하였습니다. 

시 여러 구역을 점령한 서부 연합국들(미국, 영국, 프랑스)과 소비에트 연방 간의 긴장 관계가 고조되었고, 이는 냉전으로 이어졌으며, 수도 베를린의 축구는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됩니다. 헤르타는 몇 명의 선수들과 감독이 드레스덴을 연고로 하는 프리드리히슈타트에서 도주하여 합류함에 따라, 1949-50 시즌 동안 동독 클럽들과의 경기가 금지되었습니다.  시 동부에 있던 몇 팀들은 오버리가 베를린에서 퇴출되었고, 이 팀들은 1950-51 시즌을 기점으로 새로 출범한 DDR-리가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에 팀은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과 격렬한 라이벌 관계를 가지는데, 1958년에 두 클럽 간의 합병이 제안되었으나, 이는 266명 중 3명만이 찬성하면서 기각되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www.bz-berlin.de/artikel-archiv/die-geschichte-von-hertha-bsc-teil-7]

 

1963년 분데스리가 출범 당시, 헤르타는 베를린의 디펜딩 챔피언임에 따라 새로 출범한 국내 리그의 창립 멤버가 되었습니다. 1964-65 시즌에 팀은 강등권을 벗어나서 시즌을 마무리하였으나, 시 내로 선수를 불러들이기 위해 매수하려는 시도가 적발되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로는 불쾌한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팀은 강등되었습니다. 이 사태로 전 수도를 연고로 하는 클럽이 없게 됨에 따라 정치적인 요인으로 보드진에게 그들이 원하는 분데스리가의 조성에 위기를 불러 모으게 됩니다. 여러 단계의 술수를 거쳐 결국 타스마니아 베를린이 승격되었는데, 이 팀은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악의 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968-69 시즌, 헤르타는 독일 1부 리그에 복귀하였고, 이후 우수한 활약을 펼치며, 베를린의 최고 인기팀이 됩니다. 그러나, 헤르타는 1971년에 또다시 스캔들에 연루되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몇 클럽들과 분데스리가에서 승부 조작 혐의를 받게 됩니다. 헤르타의 역할에 대해 조사를 착수하던 도중, 클럽이 6M DM(도이치 마르크)의 빚을 졌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고, 재정적 문제는 팀의 전 홈구장 매각으로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도 불구하고, 팀은 70년대에 들어서 평타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1974-75 시즌에는 묀헨글라트바흐에 뒤쳐진 준우승을 거두었고, UEFA컵에서는 1979년에 준결승 진출을 이룩하였으며, 1977년과 1979년에는 DFB-포칼 결승전에 진출하였습니다. 이어지는 시즌, 팀의 운이 쇠하여 악화일로를 걸었고, 결국 2. 분데스리가로 강등되었는데, 이후 이어지는 17 시즌 동안 13 시즌을 이곳에서 보내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후, 헤르타는 구 동독 지역에서도 인기팀이 되었습니다. 장벽 붕괴 이틀 후, 11,000명의 동베를린 시민들이 헤르타의 바텐샤이트 09와의 경기를 관전하러 경기장을 방문하였습니다. 우니온 베를린과의 친선 관계가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두 팀 간의 친선전에는 50,000명의 관중이 웅집 하게 됩니다. 1994년, 재정문제는 더욱 악화되었고, 팀은 10M DM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위기는 또다시 부동산 주식 매각과 새 스폰서 계약, 보드진 교체로 해결되었습니다. 1997년, 헤르타는 분데스리가 복귀를 이룩하였고, 이후 리그 상위 3분의 1에 들었습니다. 1997년 헤르타의 승격 원년에, 베를린의 6년 만에 분데스리가에 참가하는 팀을 두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분데스리가는 최장 기간 동안 국가의 최대 도시나 수도를 연고로 하는 팀 없이 치른 유럽 1부 리그로 기록되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www.bz-berlin.de/berlin-sport/hertha-bsc/hertha-mit-brasilien-zauber-beim-tradtionsmasters]

 

근래, 1999년을 기점으로 UEFA 챔피언스리그와 UEFA컵 등의 대외컵에 연속으로 참가하면서 팀을 밝게 빛냈고, 이는 제바스티안 다이슬러나, 브라질 국가대표이자 2005년 5월에 분데스리가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던 마르셀리뉴 등을 영입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헤르타는 유소년 아카데미에도 큰 예산을 투자하였고, 그 결과 분데스리가에 적합한 몇 명의 유망주를 배출해냈습니다. 팀은 2003-04 시즌에 강등의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그다음 시즌에는 각성을 하였고, 리그 3위에 위치해 있었는데, 리그 최종전 하노버 96과의 결전에서 비기게 되고 베르더 브레멘이 3위로 올라서 챔피언스리그를 놓쳐 리그를 4위로 마감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감사의 표시로, 베르더는 하노버 선수들에게 샴페인 96병을 선물하였다고 전해집니다.) 2005-06 시즌에 헤르타는 시즌을 6위로 마감하면서 모스크바와의 UEFA 인터토토컵에서의 승리로 UEFA컵 진출권을 획득하였으나, 1라운드에서 오덴세에 패하며 탈락하였습니다. 2006-07 시즌과 2007-08 시즌, 헤르타는 리그를 10위로 마감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성공적인 2008-09 시즌을 보내게 되는데, 리그 우승 레이스를 33라운드까지 끌고 가며 리그를 4위로 마치게 됩니다. 하지만 팀은 급작스럽게 부진을 거듭하며 2009-10 시즌에 형편없는 성적을 거두며 분데스리가 최하위를 차지하였습니다.

 


 

 

 

2009-10 시즌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며 2부 리그로 강등된 헤르타는 32라운드만에 리그 우승을 확정지으며 1부 리그로 복귀하게 됩니다. 하지만 리그 초반 반짝 빛나기도 하였지만 이후 내리 무너지며 리그 16위를 기록, 잔류&승격 플레이오프에서마저 패하게 되며 다시 2부리그로 강등됩니다. 2012-13 시즌 요스 뤼휘카이 감독이 선임된 이후 또 다시 한시즌만에 1부로 복귀하게 되고, 그 이후 계속해서 1부리그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2015-16 시즌 초반 돌풍을 일으키며 상위권에 링크되기도 하였으나, 리그 마지막에는 7위로 마감하는 등 1부리그 중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9-20 시즌 역시 11승 8무 15패 승점 41점을 기록하며 리그 10위에 머물렀습니다. 10월 말부터 리가에서 4연패를 당해 순위가 강등권인 15위까지 추락하자, 안테 초비치 감독을 경질하였고, 후임으로는 위르겐 클린스만을 선임했으며 기간은 시즌 말까지였습니다. 클린스만 부임 이후 5경기를 2승 2무 1패로 막아내며 전반기를 12위로 마감하였고, 후반기에는 조금 더 힘을 내어 리그 10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사진출처 : https://www.kicker.de/4588878/analyse]

 

시즌 첫 게임에서 SV 베르더 브레멘을 4:1로 완파하며 기분 좋은 출발을 알린 헤르타. 하지만 이후 프랑크푸르트와 바이에른 뮌헨에 모두 패하며 기분 좋은 출발을 지속하진 못하였습니다. 리그 3라운드까지 종료된 가운데 팀은 1승 2패로 리그 13위에 있습니다. 

독일의 수도, 그 중심에 있는 헤르타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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