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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 저

o헤어곽o 2020. 4. 7.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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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서 알랭 드 보통은 언어의 마술사이다. 이번 책으로 그가 보여주는 또 다른 이야기들은, 직설적이고 호쾌하지만 한편으로 따뜻함을 주고 있다.

소크라테스에서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쇼펜하우어 그리고 니체에 이르기까지 6명의 철학자의 삶의 태도와 그들의 철학을 이야기하며 그 안에서 또 다른 위안을 찾는다.

가난에 대한 위로를 건넨 에피쿠로스, 좌절에 대한 위로를 건넨 세네카, 타인의 부적절한 평가에 대한 위로를 건넨 몽테뉴 등에서 말이다.

명쾌하면서도 상쾌한 알랭 드 보통의 언어를 통해 이를 경험해보자.

 


제1장.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 - 소크라테스(Socrates)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이의 의견을 다 존중할 필요는 없고 단지 몇 명만 존중하면 되고 다른 사람들은 무시해도 좋다는 사실... 훌륭한 의견은 존중하되 나쁜 의견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다는 사실. 그것 참 멋진 원칙이라고 자네는 생각하지 않는가? 그리고 훌륭한 의견은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의 것인 반면, 나쁜 의견은 이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의 것이지... 그러니 훌륭한 나의 친구여,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떤 말을 하든 마음 쓸 필요가 없소. 하지만 전문가들이 정의와 불공평의 문제에 대하 하는 말에는 신경을 써야 하오.

 

우리는 주변 사람 모두에게 사랑받고, 모두에게 인정받으며, 모두의 만족을 충족시킬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유로써 모두의 마음은 하나하나 다르기에 그 모두를 충족하기란 불가능하며,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많이 들어왔던 말이지만, 새롭게 다가오는 구절이 꽤나 있다. 소크라테스는 힘주어 이야기한다. 단 한 명일 지라도 그 부분의 전문가 혹은 그저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으로 족하다고. 그러니 부디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싫어한다고 하여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기를. 모두에게 인정받을 필요는 없으니 타인의 이야기에 너무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음을 인지하기를.

 


 

모두가 더불어 사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평가와 자신의 실제 사이의 간극 때문이다. (P. 67)
소크라테스의 예를 따라, 늘 이성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는 최고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P. 71)

 


 

제2장.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위안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욕망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것들은 자연스럽고 또 필요하다. 또 다른 것들은 자연스럽긴 하지만 불필요하다 그리고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많은 욕망도 있다.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제거된다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지않은 쾌락을 제공한다.
이미 황혼 녘에 다다른 마당에 나는 원하노라. 죽음이 덮치기 전에 쾌락의 충만함을 축하할 훌륭한 송가를 하나 만들어 마음이 차분하게 정리된 사람들을 돕기를.

 

쾌락은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목표라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행복의 요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까? 돈, 건강, 명예, 가족, 사랑, 친구 등등... 이 모든 것이 물론 중요하겠지만, 에피쿠로스는 우리의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면 더 많은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중에서도 에피쿠로스는 친구와의 식사에서 큰 행복을 찾았다.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단 한 명의 친구만 있어도 족한 그였다. 궁핍과 결핍 속에 있을지라도, 그는 빵 한 조각과 그 한 조각을 함께 할 진정한 친구 한 명이면 행복하다고 느낀 것이다. 

이처럼 그는 이야기한다. 궁핍에서 오는 힘듬과 좌절은 아무것도 아님을. 너무 그에 얽매이지 말기를.

그는 사색을 이를 위한 도구로 강조한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사색을 하라고. 그로 인해 불안의 원인을 알아내고, 그 원인을 해결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준비되지 않은 채로 맞이하는 고통을 없앨 순 있다고.

 


 

불안을 다스리는 데는 사색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문제를 그로 적거나 그것을 대화 속에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그 문제가 지닌 근본적인 양상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 문제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것 등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 등을 예방할 수 있다. (P. 96)
인간이 결코 경험하지 못할 어떤 상태를 두고 미리 자신을 놀라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P.97)
하지만, 꾸준히 삶을 앞으로, 파도 거센 바다를 헤치고 나아가도록 몰아붙였던 것도 바로 이런 불안이었다. (P.114)

 


제3장. 좌절에 대한 위안.

세네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란 도대체 뭔가? 약간의 충격, 약간의 타격에도 터지고 말 혈관... 자연 상태에서는 무방비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하고, 운명의 여신이 내리는 모든 모욕에 고스란히 노출된, 허약하고 부서지기 쉽고 발가벗은 육체.
그대는 말하겠지.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라고. 그렇다면 그대는,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고, 그것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 그리고 우리는 만물의 질서를 바꿀 수 없다. ......우리의 영혼이 순응해야 하는 것은 이 (자연의) 법칙이다. 이 법칙을 우리는 따라야 하고, 이 법을 우리는 준수해야 한다. ...... 당신이 개조시킬 수 없는 것이라면, 참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네로 3세라는 희대의 폭군의 과외선생이었던 그는 진즉에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되고, 벗어나려 몇 번이고 시도를 하였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서 순응을 한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운명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어찌 보면 꽤나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그것에 대한 준비는 상황을 납득할 수 있게 하며, 좌절을 참을 수 있게 한다고 강조한다. 

"마차에 달린 줄에 매달려 따라가는 개"에 인생을 비유하는 그의 논리는 꽤나 거칠다. 하지만 그 속에서 그 마차의 진로를 예상할 수 있기에 그 안에서 줄에 목이 당기지 않도록 잘 따라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어찌 보면 그의 중요한 논지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은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순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의 희망과 반대되는 현실에 반항하느라 힘 빼지 말고 필요한 것을 정확히 파악하여 순응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말이다.

철학의 임무는 우리의 바람이 현실세계와의 단단한 벽에 부딪힐 때 가능한 한 부드럽게 안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라는 세네카. 그는 과연... 운명의 개척자일까, 운명의 포로일까?

 


철학의 임무는 우리의 바람이 현실세계의 단단한 벽에 부딪힐 때 가능한 한 부드럽게 안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P. 130)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포기하기만 하면 우리가 그렇게 화를 내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P. 137)
감옥에 갇히거나 유배되는 것은 물론 좋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세네카의 주장의 핵심은 그런 처벌이 그가 근삼의 본질을 면밀히 분석하기 전에 두려워했음직한 그 정도로까지는 절망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P. 154)
현명한 사람은 아무것도 일을 수 없다.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모든 것을 가진다. (P. 157)
의지에 한하는 사건들이 일어날 때 우리가 일으킬 수 있는 반항의 고통을 줄이려면, 지금까지 각자의 목을 죄고 있는 사슬이 풀어진 경우가 결코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점을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P. 172)

 


 

제4장.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어리석은 짓을 했거나, 어리석을 말을 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보다 넉넉하고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우리 인간은 한갓 멍청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안고 있는 지적 우둔함을 간파한 사람이면 누구나 놀랄 만한 이야깃거리를 갖게 될 것이다. 인간의 지력을 위대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그런 중요한 인물들에게서조차 그처럼 엄청난 잘못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인간에 대해, 인간의 감각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이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사람이다. 인간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것치고 나에게 낯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부적절하다는 것이 결코 부정된 것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몽테뉴. 그 역시도 꽤나 부적절한 사람이고 부적절한 철학자였다. 그 역시 스스로 그렇게 인정하듯이 말이다. 쉽게 말해, 인간은 누구나 '멍청이'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모두가 '지혜롭다고'칭송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어느 부분에서 부적절하다고 해서 스스로를 부정하지 마시길. 몽테뉴의 이야기에서 위안을 얻길 바란다.

문화적으로 비추어 보아도, 부적절함은 그릇된 것이 아니다. 책에 인용된 이야기를 예로 들면, 과거 열린 화로로 집을 난방하는 프랑스식 난방법과, 카스테노펜이라 불린 상자 모양의 폐쇄된 난로로서 난방을 하는 독일식 난방법을 비교할 때, 이 둘은 서로 간에 차이를 가지는 것이지, 어느 하나가 그릇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식 난방법만을 겪고 살아온 이들은 독일식 난방법을 잘못된 방법이라 이야기할 수 있고, 반대된 입장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부적절함은 부정됨이 아니다. 

 


독서는 괴롭기 짝이 없는 게으름의 짓누름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준다. 그리고 언제라도 지루한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켜준다. (P. 186)
우리 인간의 괴로움 중에서 가장 세련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경멸하는 것이다. (P.198)
부적절하다는 느낌을 일으키는 또 다른 원인은 사람들이 이 세상은 두 개의 진영으로, 말하자면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으로 나눌 때 드러내는 그 거만함과 신속함이다. (P 210)
사실 몽테뉴를 괴롭혔던 것은 검증을 거치지 않고도 꿋꿋이 자신들의 의견이 상대방의 그것보다 더 우월하다고 믿는 그 맹신이었다. (P. 215)
우리는 가장 많이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P. 241)
어떤 존재는 이 세상의 눈에는 경이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까지 경이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P. 260)
몽테뉴는 흥미로운 지혜란 어느 인생에서나 발견되는 것이라도 주장했다. (P. 264)
평범하고 도덕적인 삶이라면, 비록 지례를 얻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우둔함에서 몇 발 벗어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성취를 이룬 삶이다. (P. 267)

 


 

제5장.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란 것은, 성적 관심은 별로라 하더라도, 혐오스럽고, 경멸할 만하고, 심지어 상극으로까지 보이는 사람들에게 자심을 맡기게 만든다. 그러나 종의 의지는 개인의 의지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그 연인은 자신의 것과 상반되는 모든 특질들에 눈을 감아버리고, 모든 것을 간과하고, 모든 것을 그릇 판단하고, 자신의 열정의 대상과 자신을 영원히 묶어버린다. 그런 환상에 빠진 사람은 완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그 환상은 종의 의지가 다 충족되고 나면 금방 사라지고 이제 평생을 혐오하면서 살아야 할 파트너만 남게 된다. 바로 여기서, 매우 이성적이고 심지어 탁월하기까지 한 남자들이 종종 잔소리가 심하고 악마 같기도 한 여자들과 사는 이유,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도 왜 자신들이 그런 성택을 하게 되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염세주의 철학가 쇼펜하우어는 다른 이름으로 생의 철학가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서 "생에 대한 의지"란 "사랑", 아니 조금 더 자극적으로 말해 "아이의 출산"이라는 것이다. 당대의 저명한 철학자들의 "사랑"에 대한 무관심이 당혹스러웠다고 말하는 그는 시인들의 전유물이었던 사랑에 대한 철학에 몰두한다. 인간을 덜 이성적으로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그에게 과연 사랑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들이 사랑이라고 목놓아 부르고 울부짖고 슬퍼하는 그 사랑과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사랑은 확연히 다르다. 그러기에 사람마다(물론 나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사랑에 대한 철학"에 대해서는, 사랑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는 그의 철학에는 수긍이 가지만, 사랑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수긍이 가지 않는다.

 


 

있지도 않은 모습을 받아들이려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냥 두는 것이 낫다.(P. 275)
인간 존재는 일종의 오류임에 틀림없다. (P. 287)

 


 

제6장. 곤경에 대한 위안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나와 약간이라도 인연을 맺고 있는 인간 존재들에게 나는 고통과 절망, 질병, 냉대, 경멸이 내려지기를 바란다. 나는 그 사람들이 지독한 자기 경멸과 자기 불신의 고문, 패배당한 자의 열등감과 동떨어져 지내지 않기를 희망한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풍부한 결실을 남긴 사람들의 삶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대 자신에게 악천후와 폭풍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들이 앞으로 거목으로 훌쩍 자랄 수 있을지를 한번 물어보라. 불운과 외부의 저항, 어떤 종류의 혐오, 질투, 완고함, 불신, 잔혹, 탐욕, 그리고 폭력, 이런 것들이 사실은 호의적인 조건에 속하지 않는지 곰곰 따져보라. 이런 것들을 경험하지 않고는 어떠한 위대한 미덕의 성장도 좀처럼 이룰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내게는 이 책에서 등장하는 위안을 주는 6명의 철학자 중 가장 위안이 되는 글이었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와 동일선상의 철학인 듯 하나 그와 다른 점은, 고통을 피해 방 안에 틀어박혀 피함으로써가 아니라 고통의 역할을 인지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이를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단계로 인식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점이다. 얼음산을 오르는 것으로 비유되는 니체의 철학의 중점은, 산 아래에선 평범함을 가지고, 산을 오르는 중턱에서는 극도의 고통을 느끼지만, 정상에 도달하고 나면 완성과 충만함을 느끼는 것이다. 고통을 피해 산 아래에 있는 사람보다 산 꼭대기에 선 사람이 훨씬 더 값지고 찬란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동일한 고통일지라도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정신력과 현명함의 정도에 따라 좋은 결과를 낳기도, 나쁜 결과를 낳기도 함을 인지해야 한다. 또한, 어떠한 고목도 비바람을 이겨내지 않고는 그렇게 굵은 뿌리를 바닥에 내릴 수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

 


인생의 완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든 곤경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P. 326)
가장 분별 있는 인간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애쓴다. 마음의 평온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완성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P. 328)
쾌락과 불쾌감은 서로 단단하게 묶여 있기 때문에 한 가지를 가능한 한 많이 누리려는 사람은 불가피하게 다른 안 가지도 그만큼 경험할 수밖에 없다. (P. 339)
그대 자신에게 악천후와 폭풍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들이 장래에 거목으로 훌쩍 자랄 수 있을지를 물어보라. (P. 340)
사람들이 "나는 재능이 부족해."라고 말할 때 쉽게 간과해 버리는 노력의 질이 전제되어야 한다. (P.342)
진실이라는 산맥을 타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바로 오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든지, 그렇지 않다 하더라고 내일 더 높은 곳을 오르기 위해 힘을 단련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P. 344)
악으로 불리는 끔찍한 일들도 인간성의 거대한 설계자이자 길을 닦는 역할을 맡는다. (P. 352)
모든 분야에서 그다지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으면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다. (P. 357)
미움과 사기, 탐욕, 그리고 지배욕이라는 감정들은 삶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이런 것들은 삶이라는 총체적인 경제에서는 기본이며 필수이다. (P. 360)
이빨이 아프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검 뽑아버리는 치과 의사에게 우리는 더 이상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 (P. 364)

 


그대에게 가장 위안을 주는 철학가는 누구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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